한국과 일본은 모두 지난 50여년간 미국의 안보우산 아래서 경제발전에 국력을 집중해 오늘의 번영을 이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군정을 겪은 것이나 지금까지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것도 같다. 두 나라 모두 미국과의 관계가 순탄치만은 않았다. 군사 분야의 직접적 갈등은 물론 경제 사회 분야도 크고 작은 마찰이 많았다. 그간 여러 상황을 보건대 미국과의 관계가 나빠질 가능성은 일본이 우리보다 훨씬 컸다.
▼美·日도 잦은 마찰 한국과 비슷▼
우선 일본은 세계의 패권을 놓고 2차대전에서 미국과 한판 겨룬 나라다. 1945년에는 미국으로부터 두 차례나 핵폭탄 공격을 받았다. 히로시마에 첫 번째 핵폭탄이 투하된 지 불과 사흘 뒤 나가사키 시민들도 핵폭탄에 의해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첫 번째 핵 투하 직후 일본 천황이 항복문서를 쓰고 있었는데 그새 또 핵이 투하된 데 대해 일본 내에서는 “황인종을 대상으로 핵실험을 한 것 아니냐”는 분노가 비등했다. 이 두 번의 핵폭탄으로 인한 사망자는 20만명이 넘었다.
우리는 2차대전에서 미국이 승리한 덕분에 광복을 맞았다. 비록 미소 대결로 한반도가 분단되긴 했지만 미국이 승리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영원히 일본의 식민지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한일 양국 모두 미군정을 겪었지만 일본은 패전국의 입장에서 더 오랜 기간, 더 엄격한 통치를 받았다. 많은 군인 기업인 등이 처형되는가 하면 헌법조차 맥아더 장군의 허가를 받아서 만들어야 했다.
현재 양국은 모두 미국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지만 그 배경은 많이 다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우리의 요청으로 맺어졌다고 할 수 있다. 애치슨라인 설정으로 1949년 남한에서 철수했던 미군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남한의 요청으로 돌아와 14만명 이상의 희생자를 내며 한국을 도왔다. 휴전 후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요청했다. 미일안전보장조약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과 함께 체결됐으나 당시 일본 내에선 반대시위가 격렬했다.
미군 주둔에 따른 사회적 문제도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키나와에서 미군 병사가 초등학교 여학생을 성폭행한 사건이 발생해 일본 열도를 떠들썩하게 했는가 하면 하와이에서는 미국의 핵잠수함이 일본 어선과 충돌해 고교생 4명을 포함한 9명의 일본인이 숨진 사건도 있었다. 이로 인해 일본 내 반미감정이 고조되고 재판관할권, 미군범죄자 신병인도 등 주둔군지위협정(SOFA) 불평등 문제가 미일간 쟁점이 되기도 했다.
종합해 보면, 객관적인 조건으로는 우리보다 일본에 훨씬 많은 반미 구호가 넘쳐나야 할 것 같은데 현상은 그 반대다. 미국에 대한 두려운 기억 때문일 것이라는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 또 19세기 후반 메이지유신 전야에 개국파와 쇄국파가 내전 직전의 일촉즉발 상황까지 갔던 예를 보면 일본인의 자존심이 우리보다 약한 것도 아닐 것이다.
▼국익이라는 실질 가치 더 중시▼
그렇다면 오늘날 그 일본 정치인의 관찰과 같은 차이를 만들어 낸 원인은 무엇일까. 국익이라는 실질적 가치가 일본인들의 잠재의식에 내재돼 있는 것은 아닐까. 한일 양국은 2년 전 월드컵을 공동 개최할 때만 해도 비슷한 길을 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금 한일간에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특히 미국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졌다. 어느 쪽이 옳은가. 긴 안목으로 볼 때 어느 편이 국익에 도움이 될 것인가. 요즘의 반미가 깊은 지혜와 진지한 철학, 그리고 정확한 판단을 토대로 하고 있는 것인가. 함께 고민하고 심사숙고해야 할 과제다.
정몽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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