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프런트’(1954년)에 이어 그에게 두 번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긴 ‘대부’(72년)의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은 “브랜도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나오는 이런 저런 말을 싫어할 것”이라며 “슬프다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라고 가슴 아파했다. 역시 그가 출연한 바 있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72년)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은 “그는 죽음을 통해 불멸의 존재가 됐다”고 애도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도 “미국은 위대한 배우를 잃었다”는 성명을 내며 슬퍼했다.
1924년 세일즈맨인 아버지와 무명 여배우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50년 ‘더 멘(The Men)’으로 데뷔한 뒤 8차례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 지명과 두 차례의 수상 등 정상의 영예를 누렸다. 51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야수적인 자동차광 코왈스키 역은 브랜도를 반항과 불복종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무심한 듯 웅얼거리는 말투와 강렬한 눈빛의 ‘브랜도식’ 연기는 이후 많은 추종자를 낳았으나 브랜도는 결코 복제되지 않았다.
60년대 슬럼프에 빠졌던 그는 72년 ‘대부’에서 마피아 대부 돈 비토 콜레오네 역으로,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아내를 잃고 육체적 사랑에 몰두하는 폴 역으로 각기 출연해 카리스마를 되찾았다.
하지만 그의 스크린 밖 인생은 어두웠다. 그는 “연기는 공허하고 쓸데없는 직업”이라며 노출을 꺼렸고 한때 130kg이나 된 체중 때문에 은둔자로 지냈다. 가정도 어두웠다. 세 번의 결혼과 이혼으로 최소한 11명의 자식을 둔 것으로 알려진 그는 90년 아들 크리스티안이 이복 여동생 체옌의 남자 친구를 살해한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크리스티안이 유죄 판결을 받고 체옌은 이 사건의 후유증으로 자살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브랜도는 ‘슈퍼맨’(78년)에 400만달러(약 48억원)의 개런티를 받는 단역으로 나와 주연 크리스토퍼 리브보다 더 많은 출연료를 받기도 했다. 그는 적지 않은 부를 쌓았으나 크리스티안 재판 비용 때문에 말년에는 2000만달러의 빚더미에 앉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할리우드에 내가 있는 유일한 이유는 돈을 거절할 수 있는 도덕적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브랜도는 이처럼 늘 냉소적이었다. 그러나 팬들은 그를 여전히 거부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매력을 지닌 배우로 되새기고 있다.
뉴욕〓홍권희특파원 konihong@donga.com
김갑식기자 dunanwor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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