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 2001년 8월 31일자 A27면 보도
김창생씨(82)와 아내 손순이씨(80)가 백년해로를 약속한 것은 1941년. 양가 부모 입회하에 맞선을 본 지 한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지만 아내는 한동안 처가에서 따로 지내야 했다. 고된 농사일을 하면서 김씨는 1년에 두 차례만 처가를 방문했다. 결혼 2년 만에 아내를 집으로 데리고 왔지만 힘든 농사일에 여념이 없어 오붓한 시간도 갖지 못했다.
수중에 돈 한 푼 없던 그의 눈에 당시 멋쟁이들의 전유물이던 담배와 양복이 끊임없이 어른거렸다. 고향과 사할린을 오가던 형님의 양복차림새가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아내가 집으로 온 지 두 달 만에 그는 훌쩍 사할린 광산으로 떠났다. 그러나 2년 뒤에 돌아오겠다고 편지로 전한 그의 약속은 일제 패망과 소련군의 사할린 진주로 물거품이 됐다.
손씨에게 시댁을 떠나 재혼하라고 전한 1954년의 편지가 그의 마지막 연락이었다. 사할린에서 발이 묶인 그는 1963년 러시아 댄서와 재혼했다. 그러나 녹색저고리와 분홍치마를 입었던 아내에 대한 그리움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꿈속에서도 아내는 언제나 머리를 곱게 땋아 내린 새색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소련이 붕괴하고 1998년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한국 방문 기회를 갖게 된 김씨는 아내가 수절해 온 것을 알고 영구 귀국을 결심했다. 2년을 설득해 러시아 아내와 이혼한 그는 2001년 귀국해 손씨와 재결합했다.
이후로 두 사람은 경북 고령군 대창 양로원에서 함께 생활해 왔으나 최근 부인은 관절염이 악화돼 인근 병원에서 입원 치료 중이다.
신에 대한 믿음이 남편과의 재회를 확신하게 했고 58년간 수절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말하는 손씨는 “꿈속에서 우리는 항상 같은 집에서 지냈고, 대화를 나눴다”며 “다른 보통의 부부들과 마찬가지 생활을 해 왔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영식기자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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