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8·15에 대한 한국과 중국, 일본의 역사적 기억은 어떻게 다를까.
‘아시아 평화와 역사교육연대’는 11일 서울 중구 명동 전국은행연합회관 2층에서 ‘역사인식과 동아시아 평화포럼’ 서울대회를 열어 이 문제를 집중 조명한다.
2002년 중국 난징(南京), 2003년 일본 도쿄(東京)대회에 이어 세 번째로 열리는 이번 심포지엄의 주제는 ‘1945.8.15-한중일 3국의 역사적 기억과 전승’. 역사교과서, 젠더(姓), 기념관, 미디어를 주제로 한 한중일 학자들의 발제문을 보면 같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억에서 미묘한 차이가 드러난다.
한국 학자는 국가권력의 변천에 따른 선택적 기억과 망각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한국교원대 신주백 연구원은 8·15와 광복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교과서의 기술과 관련해 검인정기(1945∼1973)-국정기(1974∼2002)-검정기(2003∼현재)의 차이에 주목했다.
검인정기의 ‘민족의 해방’이 국정기의 ‘민족의 광복’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연합군에 의한 일본 항복이 점차 민족주의계열의 임시정부 독립투쟁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인식이 이동했지만 한편으로 만주지역 독립운동 등 사회주의계열의 활동은 의식적으로 망각됐다는 것.
검정기에 들어서 만주지역 무장투쟁과 사회주의계열 활동이 서술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임시정부 정통성을 강조하는 ‘민족 과잉’ 현상이 두드러진다는 평가다.
중국측은 역사적 망각에 좀 더 주목했다. 부핑(步平)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소장은 전쟁 체험의 기억을 간직한 세대가 주도했던 1980년대 중반 이전과 간접적 기억을 보유한 세대가 역사의 전면에 나선 1980년대 중반 이후, 그리고 전쟁체험이 전무한 2000년 이후 상황을 비교하며 기억의 쇠퇴를 우려했다.
그는 “침략전쟁을 부인하는 일본 우익의 창궐이 그에 대한 반발로 역사인식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선동적 구호와 공허한 설교만 난무하게 한다는 점에서 기억의 공동화(空洞化)를 가속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8·15에 대한 기억이 현재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국가는 일본이었다. 일본학자들은 일본이 8·15를 패전이 아니라 종전으로 부르면서 오키나와전과 원폭 투하 등 피해의 체험으로만 내면화하고 가해자로서 책임을 외면한 것이 오늘날 과거로의 회귀냐 단절이냐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문제의식을 뚜렷이 보여주는 것은 일본 여성계의 체험이다.
요네다 사요코(米田佐代子) 총합여성사연구회 대표는 “전쟁에 직접적 책임이 없던 일본 여성들에게 8·15는 눈앞에서 아이들과 고령자가 죽어가는 것을 목격한 끔찍한 경험, 남편과 자식을 전쟁터로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남녀 평등의 해방감으로 다가섰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런 피해의식이 가해책임에 대한 자각으로 전환된 것은 일본의 재무장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이 대두되면서였다고 설명했다. 일본 여성계의 이런 인식은 이를 ‘자학사관’이라고 비판하는 가부장적 일본 우익과 도처에서 뚜렷한 대립전선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
가쓰라 게이이치(桂敬一) 릿쇼대 사회학과 교수도 1980년대 이후 산케이(産經)신문이나 문예춘추 같은 미디어들이 일본의 전쟁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결국 과거 군국주의 전통과 가치관으로 회귀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8·15는 2차대전 전과 후의 일본 역사를 단절하는 전환점이 되어야지 연속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돼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