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9월 후진타오는 고향의 부친과 두 동생을 떠나 열차를 타고 북경 서교의 청화대학에 입학, 중국 최고학부의 학생이 되었다. 그가 청화대학에 입학했을 때 마오쩌둥이 이끌던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삼면홍기운동(三面紅旗運動)을 한창벌이고 있었다. 이에 따라 대약진 운동이 전국적으로 실시됐고 시골에서는 인민공사가 설립됐다. 모든 군중들은 생산증가 투쟁에 동원됐다. 또 당시는 전국적으로 대련강철운동이 한창이었다. 철강생산을 늘이기 위해 가능한 모든 쇠붙이를 녹여 강철을 만들자는 운동이었다. 북경 사람들 역시 집안의 난방 기구를 뜯어내 용광로에 던져 넣었다. 후진타오 역시 이 열기에 빠져들어 친구들과 함께 발 벗고 나섰다. 과학의 전당이라고 불리는 청화대학생들이 철강증산운동에 뛰어들었다는 것은 이 운동이 얼마나 광풍처럼 진행되었는가를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삼면홍기운동은 1960년대 처절한 실패에 직면하게 되었다. 공산주의의 천당이라고 불리던 인민공사 식당에서는 밥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전국적으로 기아가 만연했고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계속 늘어났다. 후진타오가 먹을 수 있는 식량은 한달 약 15 Kg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거친 잡곡과 거무튀튀한 밀가루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흰 쌀밥은 1년 내내 겨우 몇 번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식당의 채소는 오로지 배춧잎과 감자뿐이었다. 하루 종일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고 얼굴은 핏기가 없어 창백했다. 후진타오가 대학에 입학해서 제일 먼저 배운 것은 바로 마오쩌둥의 이러한 유신주의에 회의를 느낀 것이었다.
그러나 청화대학은 역시 중국의 최고 학부였다. 많은 지도자가 배출되었듯이 공부를 열심히 시키는 면학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으며 경험이 많은 교수들은 학생들을 장차 나라의 지도자로 키우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후진타오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는 다른 학생에 비해 나이가 어렸지만 성적은 가장 좋았다. 1965년 그가 졸업할 때 각 과목의 성적은 대부분 5점(최고점수임)이었고 4점은 단 한개 과목뿐이었다. 졸업 논문 또한 우수한 평가를 받았다. 결국 그는 졸업할 때 '배움이 깊어 벼슬길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學而優則仕)'는 졸업장을 받게 되었다.
▲ 관리의 길로 접어들다
후진타오는 대학시절에 육체적인 성장기를 맞이했다. 키가 갑자기 껑충 자랐고 얼굴도 미남 형으로 가다듬어졌다. 그는 대학 1학년 때 '당의 조수(助手)'라고 불리는 공산청년단에 가입했다. 그가 강소성 태주중학 시절에 정치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고 입단을 신청한 적이 있다는 공문서가 청화대학에 전달되어 입단이 쉽게 허락되었다. 그가 맡은 일은 문화선전 공작단의 무용대 서기였다. 교내 활동에 적극적이라는 점, 성격이 쾌활하고 노래를 잘 부른다는 점, 학업성적이 좋았을 뿐 아니라 미남이라는 점 등이 그곳에 선정된 배경이었다.
후진타오는 지금도 오르도스(내몽고 자치구 중 남부지역)지역의 몽고춤 서너 동작을 완벽하게 보여줄 수 있다. 모두 그때 배운 것이었다. 같은 무용단원으로 있던 한 친구는 후진타오가 대인관계 즉 중국의 정치용어로 표현하자면 군중과의 관계가 좋았다고 한다. 그는 무용대의 주요 배우이기도 했지만 단 지부의 서기 역할도 무시할 수 없었다. 공연이 있을 때마다 도구를 급히 옮겨와 무대에 배치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는 하찮은 역을 맡았어도 최선을 다해 늘 성공적으로 연기를 해냈다. 가끔은 그가 남의 잘못을 정확하게 지적하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그를 좋아했고 사이가 좋아 함께 이야기하고 웃으며 사이좋게 지냈다.
대학 2학년이 된 후진타오는 18세가 되면서 규정상 입당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는 사상(紅)이나 기술(專)적인 면에서 모두 우수해 공산당원이 되기에 충분한 자격을 지녔다. 학과 당 총지부는 망설임 없이 그를 양성 대상으로 삼았다. 소업주 출신의 대학생인 후진타오에게 정치적 발판이 마련된 셈이다.
청화대학 수리공정과 당 지도부는 후진타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대기근으로 3년(1960~1962년, 이 기간 중에 중국 대륙에서는 3,000만 명 이상이 굶어죽었다) 동안 후진타오는 어떠한 불만이나 원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정치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고 자기관리에 엄격했다. 당의 방침과 정책을 옹호하고 민중과 단결하고 연계하는 데도 뛰어났다. 강력한 통솔력으로 당 조직이 요구하는 일들을 모두 이루어냈다."
후진타오는 학교성적이 우수하고 4년 동안 열심히 노력했다는 평가에 힘입어 1964년, 학과 당 지부의 예비당원이 되었다.
1964년 가을 당 지부는 후진타오에게 1~2학년 학생을 책임지는 정치지도원 자리를 맡겼다. 이는 대학을 졸업하면 학교에 남아 정치 간부 또는 교원이 될 것이라는 확실한 신호였다. 청화대학의 하부조직 간부에 속하는 정치지도원은 당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1965년 4월 후진타오는 1년간의 예비당원 검증을 거쳐 정식으로 중국 공산당원이 되었다.
1960년대 중국대륙에는 졸업 전날 밤, 그동안 밀회를 즐겼거나 또는 암암리에 서로 마음이 통한 남녀가 연인 관계임을 공개하는 것이 유행했다. 후진타오에게도 그런 여인이 있었다. 용모가 빼어나고 고상하며 같은 반에서 나이가 가장 어렸던 류용칭이 바로 그의 연인이었다. 류용칭은 후진타오의 반려자가 된다.
1965년 여름 후진타오는 졸업했다. 그는 졸업 후 학교에 남아 정치지도 및 학과 관련 연구에 종사할 수 있게 됐다. 같은 과 학생들이 대부분 전국 곳곳의 수리공장에 배치되었던 것에 비해 그의 앞날은 비단이 놓인 수처럼 찬란하기 그지없었다.
▲ 문화혁명의 피바람이 불어 닥치다
후진타오가 청화대학에 남아 정치지도원 일을 맡고 있을 때 중국에서는 거대한 물결이 일고 있었다. 문화혁명이 바로 그것이다.
마오쩌둥의 기본 전략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형성된 당 실무파를 공격한 뒤 자신의 세력을 전면 배치하겠다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이 전략의 성공을 위해 '상하이 시를 끌어들여 북경시를 타도한다'는 전술을 택했다. 상하이는 친 마오쩌둥 세력이 집결해 있는 곳이었다. 마오가 문화혁명을 실시한 목적은 사실 당내 후루시초프와 같은 인물, 즉 류사오치가 이끄는 당 관료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마오는 먼저 학생들을 선동해 당 관료들에게 반기를 들도록 부추겼다. 북경대학과 천진대학은 그 주요 전장이었다. 이 두 대학을 필두로 점차 북경의 다른 대학으로 불길이 번져나가 각 대학에는 학교의 당 조직을 비판하는 대자보가 나붙기 시작했다. 불똥 하나가 봄 산을 태우듯 맹렬한 기세였다. 당 조직을 보호하려던 각 학교 간부 및 학생들은 곧 반역학생으로 몰렸다.
후진타오는 문화혁명 초기에 보황파였다. 장난시앙 총장이 이끌고 있는 청화대학 당 위원회가 중점적으로 양성했던 그였다. 후진타오는 정성으로 청화대학 당 위원회에 보답했다. 그러나 청화대학 역시 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져들면서 총장과 그 교직원들은 혁명 공작조에 의해 진압 당했다. 즉 총장 등은 혁명파에 의해 강하게 비판을 받았고 후진타오는 근신하면서 상부의 조사를 받았다. 그는 다른 간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격이 약하고 계급이 낮았지만 "마오쩌둥 저서에 대한 학습이 충분치 못했고 당 중앙과 주석의 혁명 노선을 수행하는데 실수가 있었다"고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후진타오는 신입 간부였기 때문에 처음 이 혼란 속에서 큰 상처를 입지 않고 공작조의 한 자리를 얻어 "공을 세워 속죄하라"는 지시에 충성을 받쳤다. 그러나 이 같은 충성과 자리지킴도 오래 가지 않았다. 마오쩌둥이 혁명의 책략을 바꿈으로서 청화대학 공작조 지도부는 다시 비판을 받고 그에 속해있던 후진타오는 혼란과 당황 속에서 무기력해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처럼 좌지우지 됐다'.
▲ 혼돈 속에 먼 곳으로 내 몰리다
1966년 한 여름 각 대학 부설 중 고등학교 간부 자제들이 "아버지가 영웅이면 아들이 혁명사업을 계승하고, 아버지가 반동이면 아들이 혁명사업을 배반한다.'는 엉뚱한 혈통논리를 전개했다. 또 오래 전부터 제기되었던 구사상, 구문화, 구풍습, 구습관을 타파하자며 파사구(破四舊)를 외쳤다. 이들은 마오를 지지하지 않는 학생과 그 가족, 교직원들이 '무산계급의 독재정치'를 비판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구시대 사람들은 노동을 통해 사상을 개조해야 한다(노동개조)주장했다. 구시대 사람들을 북경에서 내몰아 시골로 보내(下方) 정신 재무장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바람이 급기야 청화대학 까지 번져 후진타오도 그 소용돌이 속에 휩싸이게 됐다. 후진타오는 소업주라는 착취계급 가정 출신으로 청화대학 당 위원회가 양성하던 (紅專, 사상과 기술을 겸비한) 간부였다. 자연히 고급간부의 자제 눈에는 '타도대상'으로 비쳤다. 결국 이 같은 살벌한 분위기 속에 후진타오는 2달 동안 노동개조에 참가하게 된다. 땅을 쓸고 화장실을 청소하는 등 잡일을 하면서 하루아침에 정신노동자에서 육체노동자로 바뀌었다. 그 후 방황하던 후진타오는 냉정을 되찾고 결단을 내렸다. 그는 자신의 귀중한 정치생명을 걸고 문화혁명이라는 난폭한 열차에 올라타지 않기로 했다. 그는 청화대학 소요파(逍遙波)가 되어 시대의 흐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태를 관망했다.
1968년 여름 청화대학은 또 다시 두 파로 나뉘어 대규모 격투를 벌였다. 이른바 '100일 전쟁'이었다. 쌍방은 각자의 방식대로 대량의 총과 탄약, 몽둥이와 칼로 무장했다. 차를 개조해서 탱크를 만들기도 했다. 문화혁명은 겉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홍위병들이 조직되어 기세 높게 날뛰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사태가 너무 심각하게 되자 마오는 홍위병 대표를 만나 그 조직을 해산시키고 그들을 비판의 대상으로 몰아갔다.
후진타오는 문화혁명 초기 북경에서 벌어진 맹렬한 대혁명을 눈으로 직접보고 정신적 타격을 받았다. 그는 좌·우파 어느 쪽에도 참가하지 않고 대신 청화대학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결국 그는 사상이 불순한 사람들이 몰려있는 황량하고 적막한 유가협 수력발전소 건설현장으로 배치됐다. 후진타오는 그곳에서 9년간 공부하고 근무했으나 그것이 훗날 커다란 정치적 이익을 가져올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그는 그 일로 주은래(周恩來)의 총비서를 지낸 쑹핑(宋平)을 만나 그의 천거로 중앙무대의 지도자로 발탁된다.
연국희기자 ykookhee@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