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3월 후진타오는 국가 부주석이 되어 외교무대에 오른다. 같은 해 7월 군대와 경찰의 상업 활동을 금지하는 일을 주관, 군대와 경찰 영역으로 발을 넓혔다. 이듬해 9월에는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주석은 장쩌민)으로 임명돼 군 통수권을 이어받을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후진타오는 중국 차세대 지도자 중 유일하게 외교 군사 경찰 등의 방면에서 최고 정책결정 과정에 참여했다.
후진타오는 당으로부터 배우고, 당에 충성하는 길을 일관되게 걸어왔다. 또 자격을 따지고 서열을 중시하는 정치풍토에 따라 장쩌민의 신뢰를 얻었다. 그는 다양한 상급지도자들의 호평을 받았다. 감숙성에 있을 때는 송핑(宋平)의 눈에 들었다. 공산청년단 시기에는 왕자오궈, 후유오방, 치아오스, 후치리 등에게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일할 때 덩샤오핑, 장쩌민, 주룽지 등은 모두 후진타오의 책임감 있는 업무처리와 정치적 처신에 대해 신뢰를 보냈다.
장쩌민과는 마치 군주와 황태자의 관계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봉건왕조의 황제와 황태자의 관계처럼 혈연으로 맺어진 것이 아니었다. 순수하게 당력과 자격 면에서 선후배 사이였다. 그들 사이의 이해관계야 말로 최고 지도자와 후계자의 관계를 규정짓는 유일한 변수이자 기준이었다.
제15기 당 대회 이후 후진타오는 업무와 정치적 활동에서 여전히 업적을 쌓았다. 그는 당 업무의 지평을 개척하고자 많은 노력을 했다. 먼저 농촌 민주선거 제도와 농촌의 자치업무 제도를 도입하고 이를 확고히 실행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농촌 민주정치 실행 후에는 당 하부 조직 건설에 몰두했다.
1993년 후진타오는 어떻게 농촌의 당 조직을 건설하는 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농촌사회주의를 바탕으로 한 시장경제 체제의 건립을 연구,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농촌의 농기업과 3차 산업을 빠르게 발전시키는데 노력하자. 향(鄕), 촌(村)의 당 조직 건설에 새로운 문제를 제시해야 한다. 농촌 당 지부를 정돈, 업무 효율을 제고시켜야 한다. 특히 유능한 농촌지역 당 간부를 선발, 육성해야 한다"
이는 당의 전통적인 일원화 지도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농촌에서도 시장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9억 명에 이르는 농민들 역시 금전 만능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농촌의 당 하부 조직이 해이해지고 당원은 돈을 버는데 혈안이 되었다. 어떤 당원 간부는 직권을 남용,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당 간부의 위신과 권위라고는 전혀 없고 돈을 벌어 부자가 된 사람만이 영웅이었다. 농장에는 발언권이 있는 지방 재산가들이 속속 생겨났다. 농촌에서는 종교적 미신과 낡은 의식들이 부활, 당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후진타오는 가급적 자주 농촌을 시찰했다. 지방 당 간부들과 만나 현지 문제들에 대해 협의하면서 대책을 찾기 위해 애를 썼다. 농업을 주관하던 원자바오 부총리도 이 문제에서 후진타오와 생각을 같이 했다. 결국 이들은 농촌문제를 민주적으로 관리해야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촌장을 민선으로 추대하며 촌민 자치위원회를 조직해서 농촌에서 자주를 실행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매우 혁명적인 발상이었으나 장쩌민의 지지와 인정을 받았다. 농촌에 새로운 민주질서가 점점 자리를 잡아가면서 이 제도가 공산당 파견 방식보다도 효율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후진타오는 업무추진에 있어 주저함이 없는 사람이다. 후진타오는 이를 계기로 농촌 건설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는 "사람이 있어 일을 관리하고, 돈이 있어 일을 수행하고, 법이 있어 일을 합리적으로 추진한다"는 삼유화(三有化) 정책을 주창했다. 중국은 농촌 민주정치 개혁과 당 하부 조직업무 강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 농촌질서를 바로 세우는데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후진타오는 정치적으로 멀리 내다볼 줄 알고 실행하는 능력이 뛰어난 지도자였다. 업무추진에서 창의성이 돋보였다. 그는 당 조직의 개혁을 맡아 유사한 국무원 기구를 간소화하거나 폐지했다. 중앙선전부, 중앙조직부, 중앙당교, 공산청년당, 전국부녀연합회 등의 인원을 3분의 1 가량 줄였다. 그는 정상적인 사람으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의 많은 업무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일의 경중에 따라 업무를 처리, 순서가 있고 조리가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또 그의 참신한 개혁 정신과 성실한 업무 수행 태도를 본 장쩌민은 그가 안심할 만한 지도자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후진타오는 어떤 일을 하든, 혹은 정치적 장소라 할지라도 자신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말과 행동에서 지나침이 없다. 언제나 자신을 낮추고 공적을 자랑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공을 언제나 덩샤오핑이나 장쩌민 같은 지도자의 업적으로 돌렸다. 후진타오가 중-일 관계 정상화 과정에서 보여준 겸손은 그의 처세술을 보여준다. 그는 이 과정에서 모든 일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처리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장쩌민이 이끄는 당 중앙의 지시에 따라 일을 처리한 결과"라고 공을 남에게 돌렸다.
후진타오는 언제나 장쩌민의 조연이었다. 그는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발탁된 후 공개석상에서 연설을 자주했다. 현장 시찰 및 방문도 많았다. 그러나 언제나 말과 행동을 삼가고 조심했다.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있다는 정치적 처신과 증거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장쩌민은 이런 후진타오를 '합격된 후계자'라고 칭찬했다.
후진타오는 공산당 조직 업무의 귀재라고 할 만하다. 그에게는 중국인의 사랑을 받는 저우언라이 총리의 기풍이 있다. 평화시에 병마를 타는, 내일을 준비하는 치밀함을 갖고 있다. 후진타오는 간부들과 친밀히 지냈다.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후진타오의 명성은 대단히 높았다. 그는 전국 청년주석 자리를 맡고 있었을 때 문화계 인사들과도 폭넓은 교류를 가졌다. 현재까지도 이들과 대부분 친밀히 지내고 있다.
후진타오는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극진해 칭찬이 자자했다. 후진타오가 귀주성 당서기로 일할 때 당시 태주중학 교장이 회의를 위해 귀주성을 방문했다. 후진타오가 그 소식을 듣고 선생님을 간절히 뵙고 싶어했다. 또 자신의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마오타이주 한 병을 스승에게 보냈다. 태주중학 시절 한 담임선생님과는 티베트 자치구 서기였을 때도 편지를 주고 받았다. 후진타오는 그 편지에서 이렇게 감사의 편지를 썼다. "내 업무에 성과가 있다면 이는 모교가 나를 키워주었기 때문이다. 태주중학의 엄격한 학풍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스승을 존경하고 배움을 중시하는 후진타오의 정신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라는 높은 관직에 올랐어도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인간미와 근본을 잊지 않는 후진타오는 또 지식과 지식인을 존중하는 마음을 여러 곳에서 나타냈다. 이러한 언행은 결국 초목이 자라기에 알맞은 봄바람과 비처럼 효율적인 방식으로 민심을 얻을 수 있었다.
"민심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得民心者, 得天下)"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그의 모습은 후계자로, 그리고 중국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뛰어난 덕목이었다.
연국희기자 ykookh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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