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했던 시기, 많은 한국인이 정치적 절망감의 탈출구로 이민을 생각했던 일이 떠오르면서 초강대국 미국에서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게 신기했다.
미국은 지금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심각한 분열 상태에 빠졌다. 으레 선거 때면 여론이 갈라지기 마련이지만 올해 대선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이런 수준을 넘었다는 걱정이 나오고 있다. 3년여 전 9·11테러라는 미증유의 재난을 맞아 보여 주었던 국가적 단합과 들끓던 애국심은 잊혀진 듯하다.
이런 조짐은 지난해 11월 워싱턴포스트와 ABC방송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이미 나타났다. 대선이 1년이나 남아 있는 시점이었는데도 응답자의 46%는 민주당, 45%는 공화당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부동층은 9%. 미국의 경우 통상 공화당 40%, 민주당 40%의 지지자에 20%의 부동층이 존재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례적인 현상이었다. 40 대 40 대 20의 구도가 45 대 45 대 10의 구도로 바뀐 것이다. 지금은 부동층이 5%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유권자들이 일찌감치 마음을 정한 것은 부시 대통령에 대한 호오(好惡)가 극명하게 엇갈리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만이 미 국민의 안전을 지켜줄 수 있다고 믿는 열광적 지지자들이 있는가 하면, 대통령으로서 기본적인 자질조차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극단적 비판론자들이 있다.
세계적 헤지펀드를 운영하는 조지 소로스는 부시 대통령의 재선을 막겠다고 엄청난 재산을 내놓았고 마이클 무어 감독은 영화 ‘화씨 9/11’을 만들어 사실상의 낙선운동을 벌였다. 반대 진영에서는 ‘진실을 위한 쾌속정 참전용사들의 모임’이 흑색선전에 가까운 네거티브 캠페인으로 존 케리 후보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올해 미 대선은 부시와 반(反)부시의 대결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심하게 말하면 케리 민주당 후보는 종속변수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부시 대통령에 대한 여론이 양 극단으로 갈라진 것은 그의 이분법적 세계관에 기인한다는 분석이 많다. 동지가 아니면 적으로 간주하는 이분법적 세계관은 중간지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를 양극화한다.
민주사회에서 다른 의견끼리 충돌하고, 그러면서 공통분모를 추출해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는 서로 상대방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가능하다. 현재 미국의 분열 양상은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칫 파괴적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대선이 끝난 뒤 패배한 쪽이 진심으로 승복하겠느냐는 우려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구도가 아닌가. 체질적으로 코드가 맞지 않는 부시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이분법적 사고라는 공통점을 보인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 안에 정치적 이민을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없는가.
김상영 국제부장 yo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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