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점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진 일본은 상황이 좋았다. 질풍노도의 시대였으나 치안은 유지됐다. 덕분에 경제 토대는 굳어졌고 성장의 토양이 갖춰졌다. 7년 가까운 미군 점령 기간에도 점령군에 대한 테러는 한 건도 없었다. 미일 양국은 ‘대량 살육’의 승자와 패자란 관계를 신뢰와 화해(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관계로 발전시켰다.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의 신보수파(네오콘)는 일본의 성공신화를 모델로 이라크와 중동에서 ‘민주화 도미노’를 꿈꾸었다. 그들은 시대와 장소의 차이를 무시하고 성공 사례를 흉내 내려다 실패했다. 이런 실패와 2차 세계대전 후 미일 관계는, 전쟁의 황폐함을 딛고 일어나 새 국가를 만들려는 이들에게 소중한 점을 시사해준다. 그 중에서도 주목할 것은 시민사회의 역할이다.
최근 도쿄에서 ‘분쟁 후 국제관계 수복에 있어서 자선사업과 시민사회의 역할-전후 미일관계를 중심으로’라는 이름의 국제회의가 열렸다. 전후 미일의 상호 이해와 지적교류 측면에서 양국 시민사회가 수행한 역할에 초점이 맞춰졌다.
특히 미국의 재단들은 양국 정책연구와 정책대화를 촉진하는 데 공헌했다. 1945년부터 30년간 록펠러재단, 포드재단 등은 일본의 인문·사회과학 분야에 약 3500건(당시 금액 5300만달러)을 지원했다. 이런 사업이 가능했던 것은 일본에 적당한 파트너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초 중심 역할을 한 사람은 메이지시대 이래 최대 최고의 독지가였던 시부사와 에이이치 등 자유주의적 사고를 지닌 경제인과 학자들이었다. 그 중 마쓰모토 시게하루가 존 D 록펠러 3세와 협력해 세운 국제문화회관은 금자탑이었다.
이런 지원을 통해 축적된 정책연구와 정책대화가 공공정책에 실제로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차치하더라도 시민이 공공정책을 제안하고 정책결정 과정에 직접 개입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본사회에 인식시켜 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행정은 관료의 독점물이 아니며 시민도 행정을 담당할 수 있고 거기에 대한 책임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었다.
포드재단의 수전 베레스포드 이사장은 “재단활동에는 대의와 겸허가 과거보다 훨씬 더 요구되고 있다”고 말한다.
일본에서도 대외정책 입안과 시행에 있어 시민사회 역할의 중요성이 인식되고 있다. 환경 개발 교육 난민 인도지원 등 많은 분야에서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비정부기구(NGO)가 등장했다. 그러나 이를 지원하는 재단이 재정적, 행정적으로 충분히 독립되어 있지 않다. 정부 정책에 대안을 제시하는 연구소도 적다. NGO와 정부 사이에 진정한 파트너십이 만들어지기 어렵다.
아무튼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가 시민사회를 넉넉하게 키워준 것은 틀림없다. 미일의 신뢰와 화해의 기틀은 일본 시민사회가 보인 개혁의지에 미국 시민사회가 공명하고 협조해주었기에 가능했다.
이러한 전후 일본의 경험이 NGO 재단 대학 언론 등 시민사회에 의해 새 국가를 만들고 있는 현장에 전달되기를 바란다. 물론 현장의 실정에 맞는 형태로 모양을 바꾸어야겠지만…. 대의와 겸허함을 마음에 새긴 채,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를 진정 인간적으로 배려하는 마음을 갖고.
후나바시 요이치 일본 아사히신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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