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은 작년 5월 9일 미국 방문을 이틀 앞두고 청와대에서 신문 방송 인터넷매체 외교안보담당 논설위원 및 해설위원 20여명과 오찬모임을 가졌다. 노 대통령은 “이 자리는 토론도 아니고 질문 답변하는 자리도 아니다. 얘기 듣고 (미국 방문에서) 실수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마련했다”고 모임의 성격을 규정했다.
▼밖에서 행복한 대통령▼
그래서인지 참석자들은 갖가지 주문을 쏟아냈다. ‘불경스럽게도’ 여러 참석자들이 생전 처음 미국에 가는 대통령에 대한 불안과 초조감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듣기에 아슬아슬한 발언도 있었다. 노 대통령은 “듣는 자리지만 반론과 해명하겠다”며 길게 설명을 하기도 했고, “명색이 대통령이다”라는 말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래도 모임은 “조언이 도움이 될 것이다. 최선을 다하겠다”는 대통령의 긍정적 평가로 끝났다.
그 뒤 노 대통령은 일본과 중국 등 여러 나라를 방문했다. 외국순방을 앞두고 언론인을 만나 조언을 듣지 않아도 될 만큼 경험이 쌓인 것이다. 노 대통령은 정상외교의 재미까지 알게 된 것 같다. 이달 초 MBC 라디오에 출연해서는 “방문하는 나라마다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며 성과를 자랑스러워했다.
정상외교 순항은 좋은 소식이다. 대통령이 외국에 나가서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릴 국민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외교만으로는 성공적인 국정운영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외교가 잘된다고 해서 수렁에 빠진 내치(內治)를 건질 수는 없다.
국력이 대통령의 힘을 만드는 원천이지만 대통령 스스로 할 일도 있다. 노 대통령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기간에 만날 주요국 지도자들의 면면을 보자.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여전히 재선에 성공한 기쁨에 취해 있을 것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도 재선에 성공한 인물이다.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은 노 대통령과 비슷한 시기에 지도자 자리에 올랐지만 현재의 국내기반은 비교할 바가 아니다. 장쩌민을 물러나게 하고 군사위원회 주석까지 거머쥐었다. 하나같이 국력에 개인적 지도력을 크게 보탠 인물들이다. 그런 지도자들에 비하면 지지율 20%대에 머물고 있는 노 대통령의 국내기반은 초라하다.
지금도 생존해 있는 한 전직 대통령은 해외순방을 마치고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습관처럼 똑같은 넋두리를 반복했다. “정말이지 서울에 돌아가기 싫어. ‘외교 대통령’이나 했으면 좋겠어.” 김대중 전 대통령도 자식들의 비리 등으로 국내에서는 풀이 죽어 있다가도 외국에 나가면 금방 활기를 찾았다. 다시 정상외교로 국내의 시름을 달래기에는 국내 상황이 너무 심각하다.
▼외교로 국내 시름 달랠 수 없다▼
노 대통령은 남미 순방을 마치고 잠시 귀국했다가 28일부터 다음달 8일까지 라오스에서 열리는 ‘아세안+3’ 정상회의 참석에 이어 영국 프랑스 폴란드를 방문한다. 청와대는 ‘숨가쁜 정상외교’라고 표현했지만 ‘23일간의 세계 일주’라 해도 좋을 것이다.
정상외교는 쥘 베른의 소설 ‘80일간의 세계 일주’처럼 세계를 한 바퀴 도는 게 목적이 아니다. 순방의 성과가 국내에 투영되어야 한다. 나라가 제대로 서려면 대통령이 밖에서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행복해야 한다. 노 대통령 스스로 국내에서도 대접받는 길을 찾기 바란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아닌가.
방형남 논설위원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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