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한 멀미와 영양실조 속에서 40여 일간의 항해를 마친 ‘코레아노’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 내린 멕시코 서남부 살리나크루스 항구. 희망과 불안이 뒤섞여 혼란스러운 이들을 맞이한 것은 숨 막히게 뜨거운 바람이었다.
갖고 온 짐은 모두 불살라졌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도 몰랐다. 한인들은 충격과 공포 속에서 열차와 화물선에 실려 또다시 이동해야 했다. 프로그레소 항을 거쳐 메리다 지역에 도착한 이들을 맞이하는 환영 음악도 잠시, 유카탄 지역 농장주들은 한인들을 세워놓고 노예 경매와 같은 절차를 거쳤다.
건강한 노동자를 선점하기 위해 한인들의 입을 벌려 이 상태를 살펴보는 농장주들의 거친 행동은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이들의 마지막 체면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1970년대 한국에서도 방영된 미국의 TV 시리즈 ‘뿌리’에서 아프리카 청년 ‘쿤타 킨테’가 영문도 모른 채 미 대륙의 경매시장에 끌려나왔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일부 농장주는 한인의 상투를 잘라냈다. 떨어져 내린 것은 상투였지만 잘려나간 것은 자존심과 인격이었다. 돈을 벌 목적으로, 새로운 삶을 찾아 고향을 떠났던 이들에겐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한인 이민자의 농장생활=‘무초 칼로(너무 덥다).’ 한인들이 처음으로 배운 스페인어는 40도를 웃도는 찜통더위의 고통을 하소연하는 것이었다. 오전 5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애니깽 자르는 일에 동원된 이들은 가시밭 속에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조차 잡지 못했다.
현지 마야인들의 움직임을 곁눈질로 훔쳐볼 수밖에 없었다. 마체테(멕시코 칼) 사용도 서투르기 짝이 없었다. 날카로운 애니깽 가시에 찔려 피를 흘리는 한인들에게 농장 관리원은 사정없이 채찍을 날렸다.
한인들은 애니깽 가시에 온몸을 긁히면서 하루 5000∼6000개의 애니깽 잎을 땄다. 그러나 하루 일당 1원 30전이라는 약속과 달리 35전도 못되는 돈을 받았다.
배당받은 농장 숙소인 파하(마야 원주민 집)는 돼지우리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한인들은 작업용 장갑을 만들어 사용했다. 능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마야인은 물론 농장주들이 깜짝 놀랐다.
한인 3세인 텔마 리 박 씨(85·여)는 “이민 1세대는 농장 관리원들에게 매를 맞아 죽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며 “농사일을 몰랐던 할아버지는 이곳에 적응하지 못해 고생이 많았다”고 전했다. 한인들의 비참한 처지는 1905년 중국인 허후이(河惠)의 편지가 황성신문에 실리면서 고국의 여론을 뒤흔들었다. 그는 “이곳 토인이 지구상 5, 6등의 노예라는 소리를 듣는데 한인은 그 밑인 7등 노예가 되어 영원히 우마(牛馬)와 같다”고 전했다.
고종 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동포들을 빨리 송환하라고 명령했지만 윤치호(尹致昊) 외부협판(차관급)의 멕시코행은 일본의 방해로 좌절됐다. 대한제국은 이미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허울뿐인 정부였다.
▽재이주에 나선 한인=1909년 5월 12일 4년간의 계약기간이 끝난 뒤 마침내 자유가 찾아왔다. 멕시코 농장주와의 계약이 ‘부채 노예’ 성격을 띤 것이었지만 한인들의 타고난 성실성 덕분에 전대금을 갚은 뒤 모두 계약에서 풀려난 것.
그러나 계약노동이 끝나고 자유를 얻은 뒤의 현실은 더욱 참담했다. 돌아갈 뱃삯을 마련하기 위해 토르티야(옥수수 전병)에 소금만 쳐서 먹었던 한인들이지만 나라가 망해 버린 절망감을 이겨 낼 길이 없었다.
1910년 멕시코 혁명에 휘말렸던 이들에게 닥친 또 한번의 시련은 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불어온 1920년대의 불황. 인조섬유 발달로 애니깽 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자 한인들은 또 다른 삶을 찾아 나서야 했다.
설탕 수요 폭증으로 경기가 좋았던 쿠바는 한인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땅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쿠바 이주자들에게 다시 한번 혹독한 시련을 안겼다. 1921년 3월 쿠바로 이주한 한인 288명은 때마침 공급과잉으로 국제 설탕가격이 20분의 1로 폭락하자 사탕수수 농장을 떠나 다시 쿠바의 애니깽 농장에 매달려야 했다.
1920년대 멕시코에서 2년간 유학했던 김순민(金淳民) 씨는 당시 멕시코 이민자들의 비애를 두고 “팔려온 것을 비로소 안 동포들은 목을 놓고 땅을 치며 이것이 국가의 죄냐, 사회의 죄냐, 또는 나의 죄냐, 그렇지 않으면 운명이냐 하고 울고 불기를 마지아니했다”고 전했다.(본보 1922년 8월 5일자 3면)
급격한 혼혈로 모국어를 잊고 민족의 정체성마저 상실한 한인 후손들. 이제 이민 6세대까지 이른 한인 후손들은 ‘메히카노(멕시코인)’로 중남미 대륙 속에 빨려 들어갔다.
“‘레반타바 엘 디네로 콘 팔라(삽으로 돈을 퍼 들인다).’ 이 말을 믿고 멕시코에 왔던 아버지는 고된 노동과 절망 속에서 술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그것은 이곳 한인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메리다=김영식기자 spear@donga.com
애니깽(Henequen)은 건조한 기후에 강한 용설란의 일종. 한인들은 딱딱하고 뾰족한 가시가 있는 길이 1∼2m의 애니깽을 ‘어저귀’라고 불렀다. 초록색 잎의 껍질을 벗겨낼 때 나오는 강하고 탄력 있는 섬유질로 선박용 로프와 그물침대인 ‘아마카’를 만든다. 20년이 돼서야 꽃을 피우며, 꽃이 핀 뒤에는 수확을 하지 못한다. 19세기 후반 제국주의의 식민지 쟁탈전에 따른 선박 화물 운송량 증가로 품귀현상을 빚기도 했다. 필리핀 마닐라 삼과 함께 세계 로프시장을 양분했지만 인조섬유가 개발되자 사양산업으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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