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1939년 한국인의 창씨개명을 법제화해 강제적으로 시행한 것과는 차이가 있지만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성을 빼앗긴 것.
멕시코시티의 한인문화원 임용위(任龍尉) 실장이 지난해 말 한인 멕시코 이주 100주년을 기념해 한국대사관 강당에서 공연한 모노드라마 ‘굿나잇 코리아’의 주인공 오크만도 ‘억만’에서 바뀐 이름. 한국에 있을 때 ‘순사(경찰)’와 연관이 있었을 듯한 ‘오순사(Osunsa)’라는 성도 등장했다.
김인명(안드레스 김 히메네스) 씨는 관청에 돈을 내고 킹으로 바뀌었던 자신의 성을 원래대로 되찾기도 했다. 자신의 묘비명에는 정확한 한국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이주 한인들은 1909년 5월 애니깽(Hene-quen·용설란의 일종) 농장주와의 노동 계약 기간이 만료되면서 멕시코 전역으로 흩어졌다.
▽프로그레소의 억척 여인=한인 2세 마리아 빅토리아 리 가르시아 씨(1907∼1995)는 ‘경을 칠 혼혈아’라는 말을 듣고 살아야 했다. 한인 이민 생활 초기. 혼혈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한인사회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태어난 지 여섯 달 만에 마야인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허제호 씨는 베라크루스 지역으로 설탕을 팔러 다녔다.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고아처럼 지내던 마리아 씨는 한인 집에 수양딸로 들어가야 했다.
애니깽 농장 생활을 하며 우물물을 긷던 어린 시절. 자리를 뺏는 나이 많은 여자아이를 밀어서 우물에 빠뜨린 일 때문에 밤새 공동묘지에서 벌서야 했지만 그의 괄괄한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15세에 결혼했던 그는 아이를 낳지 못해 시어머니의 구박을 받았다. 남편은 아내가 버젓이 있는데도 현지 여인을 집에 들였다. 두 번째 남편인 멕시코인은 성격이 괄괄한 아내가 무섭다며 도망갔다. 프로그레소 항에서 만난 노르웨이 선원은 그의 일곱 번째 남편이었다.
사납고 험했던 인생역정은 마리아 씨를 더욱 강인하게 만들었다.
마리아 씨는 노르웨이 선원 올센 씨와 만나 자녀를 낳은 뒤 치클을 캐고, 소젖을 짜는 등 닥치는 대로 일거리를 찾아 헤맸다. 보름 또는 달포 만에 돌아오는 남편이 준 돈과 자신이 모은 돈으로 산 중턱 땅 일부를 사서 개간해 야자수 농장을 만들기도 했다.
마리아 씨의 아들 루이스 올센 리 씨(54)는 “어머니는 여자 혼자의 힘으로 산을 개간한 대단한 분이었다”며 “당시 주위 사람들은 밤늦게 산에서 일하는 어머니가 유령인 것으로 착각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마리아 씨는 이렇게 번 돈으로 프로그레소 항에 별장을 짓고 택시를 구입했다. 아들은 어머니가 산 택시를 운영하면서 이젠 프로그레소 개인택시조합의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멕시코시티와 기타 지역의 한인=31세의 나이로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가족이민을 결행한 김익주(金益周·호아킨 김·1874∼1955) 선생은 한인 가운데 경제적으로 가장 빨리 성공한 인사.
그는 애니깽 농장에서 계약노동이 끝난 뒤 탐피코 지역으로 이동해 냉차 가게와 식당을 운영하면서 재산을 모았다. 쿠바로 인삼을 팔러 다니기도 했던 그는 탐피코에서 국민회 지방회를 결성해 한인 회원등록 및 독립의연금 모집에 앞장섰다. 나중에는 자신이 운영하던 가게를 모두 팔아 독립자금으로 냈다.
특히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멕시코 탐피코 지방회 이름으로 여러 차례 독립자금을 송금했다. 또 3·1운동 기념행사, 순국선열기념식을 주도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그가 재산을 독립자금으로 보낸 뒤 정작 자신의 가족들은 어려운 삶을 살기도 했다.
그가 멕시코시티로 이주한 뒤 낳은 아들 안토니오 김 씨(69)는 “초등학교 5학년까지만 교육받았던 어린 시절 너무도 살기가 어려웠다”며 “마약과 도둑질 잡심부름을 하면서 살아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동네 아이들이 ‘치니토(눈 찢어진 사람)’라며 동양인을 비하하는 말을 할 때마다 “나는 코레아노”라며 싸웠다고 한다.
멕시코 이주 3세대로 넘어가면서 김 선생의 집안도 멕시코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현재 멕시코 한인 후손회장을 맡고 있는 다비드 김 공 씨(66)는 안토니오 씨의 형인 프란시스코 씨의 큰아들. 회계사로 일하고 있는 다비드 씨는 화장품 회사를 운영하는 동생 아벨 씨와 함께 멕시코 사회에 굳건하게 자리 잡았다.
멕시코시티=김영식기자 spear@donga.com
▼저임금 피같은 돈모아 독립운동 기부금 보내▼
멕시코와 쿠바의 한인 후예들은 지금도 매년 ‘3·1절 기념행사’를 치른다. 무더위와 애니깽 가시에 찔려가면서도 조국 광복을 염원한 조상들의 뜻을 기리기 위한 것.
한인들은 계약노동에서 풀려나기 직전인 1909년 5월 9일 재미 항일단체인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의 지원을 받아 ‘국민회 메리다 지방회’를 설립했다. 멕시코 이주자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314명이 창립회원이다.
재미 한인회가 불쌍한 처지에 있던 멕시코 한인의 미국 이민을 추진하다가 실패하자 선택한 차선책이었다.
국민회 지방회는 이후 멕시코 각 지역으로 퍼져 국어 교육을 통해 민족 정체성 고취에 노력을 기울였다. 한인을 하나로 뭉치게 만드는 구심점이었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멕시코 한인들은 각지 국민회관을 중심으로 독립선언 경축식에 이어 시가행진을 벌였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던 한인 1세대는 푼돈을 털어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기도 했다.
1주일에 기껏 2, 3달러를 벌었던 쿠바 한인들도 1937년부터 1945년 광복될 때까지 1489달러를 모아 송금했다.
태평양전쟁이 벌어지자 멕시코와 쿠바 한인사회는 항일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한인 이주자 가운데 대한제국 광무군 출신의 퇴직군인 200여 명은 숭무주의(崇武主義)를 주창하며 1910년 11월 메리다에 숭무학교를 설립해 군사훈련을 했다. 나라를 되찾겠다는 의지로 세워진 숭무학교에는 118명의 생도가 입학했으나 1913년 멕시코 혁명으로 폐교됐다.
▼노예이민? 개척이민? 여전히 논란거리▼
멕시코 한인 이주는 4년간의 계약노동이지만 빚을 갚지 못하면 농장에 얽매이는 ‘부채 노예’라는 특이한 농노 이민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를 두고 멕시코 메리다에서 선교활동을 벌이는 조남환 목사는 멕시코 이민은 ‘노예 이민’이 아니라 ‘개척 이민’으로 새롭게 자리 매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 목사는 그 근거로 이들이 제물포항을 떠날 때 정부에서 여권을 받았고, 출국 목적도 ‘멕시코 농장근로’여서 정당한 절차를 거쳤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전국적인 이민 모집공고에 따라 이주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였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돈을 마련한 이주자 8명은 애니깽 농장에서 4년간의 계약이 만료되기 전 빚을 갚고 풀려났다. 이를 보더라도 노예이민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게 조 목사의 설명.
그러나 대한제국이 당시 계약노동을 불법으로 규정했고, 이민자의 상당수는 하와이로 가는 것으로 잘못 알고 배를 탔으며, 농부 모집공고를 내는 등의 사기행각도 있었기 때문에 정당한 절차로만 보기 어렵다는 관측도 여전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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