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김승련]‘민주적 절차’가 무시되면…

  • 입력 2005년 1월 10일 18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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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미국 상원에서 열린 앨버토 곤잘러스 법무부 장관 내정자에 대한 인준청문회는 ‘어디서 본 듯한’ 장면을 자주 연출했다.

법사위 청문위원들은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테러용의자 신문 방식 가이드라인이 고문을 허용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며 “이 땅의 민주주의가 땅에 떨어졌다”고 개탄했다. 한 상원의원은 “좀 솔직해지자”며 내정자를 달래기도 했다. 평소 미 의회방송 채널을 통해 익숙한 의원들의 점잖은 모습은 오간 데 없었다.

곤잘러스 내정자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질문에는 “기억나지 않는다(do not recall)”고 빠져나갔다. 135쪽 분량의 청문회 속기록을 확인했더니 이 표현은 10번이나 반복됐다.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전 세계에 자랑하는 미국에서, 법질서와 인권수호의 책임을 진 법무부 장관 내정자가 청문회 내내 “고문에 반대한다”는 말을 반복하는 모습은 확실히 낯설었다.

다음 날 뉴욕타임스 독자투고란에는 “미국 법무장관에 오를 인물이 이 정도의 말을 공개적으로 해야 할 정도로 미국은 망가졌는가”라는 글이 실렸다.

곤잘러스 내정자는 또 “(포로의 인권보호를 규정한) 제네바 협약에 따라 테러 용의자를 신문하면 제대로 된 정보를 얻지 못해 미국의 안보에 손실”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국제 테러집단은 9·11테러 이후 군복을 입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전쟁과 비슷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민간인을 참수하는 등 전쟁의 일반 규칙도 지키지 않는다. 국가의 법질서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이런 초법적 집단에 대해서도 제네바 협약을 적용해야 하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은 일면 수긍이 간다.

하지만 곤잘러스 내정자의 발언에는 테러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면 민주적 절차를 저버려도 좋다는 발상이 담겨 있다고 미 언론들은 지적했다.

이는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포로수용소 포로 학대 사건에 대해 “나는 하루 8시간씩 (집무실 탁자 앞에서) 선 채로 일을 하는데 그런 일(강압 신문)이 문제냐”고 했던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의 친필 메모와 일맥상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미국은 현재 유일한 초강대국이며 지도 국가이다. 압도적 군사력뿐 아니라 절차를 중시하는 대의민주제도, 주주 및 시장 효율을 중시하는 경제제도라는 가치가 미국의 힘을 구성한다. 이런 미국적 가치는 다른 서방국가와 한국 사회에서도 주류 가치로 자리 잡았다.

1980년대 일본 경제가 미국을 따라잡고, 2000년대 중국이 잠재적 정치 군사 경제 대국으로 떠올랐지만 지도 국가로 간주하지 않는 것은 다른 나라를 선도할 ‘지도 이념’이 없기 때문이다.

미국에도 내부 문제가 없지 않았지만 우리는 미국의 이런 소프트파워(soft power)에 대해 존경과 부러움을 느꼈다.

행정부 관리들이 자의적으로 판단한 국가이익 때문에 자신들이 지켜 온 가치를 버린다면 지도이념은 무너진다. 프랑스의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은 이런 미국을 ‘민주주의적 제국주의’로 규정했다.

2005년 벽두, 미 의회에서 바라본 미국은 소프트파워의 위기를 맞고 있다.

김승련 워싱턴 특파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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