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번에 공개된 문서만으로는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의 주체와 범위 등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고, 한일협정의 청구권 조항을 둘러싼 전문가들의 해석 역시 갈리고 있어 상당한 논란이 예상된다.
징용, 징병, 군위안부, 원자폭탄 피해자 등 일제강점기 피해자들의 규모와 청구권 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협정 문서의 구체적 내용, 배상 및 보상 전망 등을 점검한다.
▽강제동원 피해자 규모=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수를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일본 측이 구체적인 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있는 데다 정부 역시 광복 직후 혼란과 6·25전쟁 등으로 관련 자료를 제대로 간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일본 측은 한일 협상 당시 이 같은 점을 알고 “배상 청구액에 대한 구체적 근거를 대라”며 한국 측을 압박했다.
최근까지 축적된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종합하면 피해자 규모는 △징용 732만여 명 △징병 38만여 명 △군위안부 4만∼20만 명 △원자폭탄 피폭자 7만 명 등 연인원 800여만 명으로 추계된다. 하지만 중복 계산된 수를 감안하면 실제 피해자는 200만∼400만 명 정도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이다.
▽개인 청구권에 대한 한일협정 문서의 내용=이번에 공개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2조 3항은 ‘한일 양국 국민은 광복일(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재산 권리 이익 등은 어느 것도 상대방 국가나 국민에 대해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고 명시했다.
또 같은 협정 2조 1항은 ‘청구권 문제는…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임을 확인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정부는 당초 ‘한국인(자연인과 법인)이 일본 정부와 기업, 민간인에게 갖고 있는 권리 중 협정문안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한일회담 성립 후라 할지라도 개별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을 협정에 명기하려 했으나 회담이 ‘포괄적인 정치적 타결’ 쪽으로 방향을 트는 바람에 이를 관철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구권 조항의 해석=한국인들이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청구권 관련 소송에서 일본 측이 배상을 거부하면서 내미는 ‘최후의 무기’가 바로 이 청구권 조항이다.
일본 측은 법정에서 △현 회사는 예전 회사와 달라 배상할 수 없다 △배상의 소멸시효가 지났다 △전쟁 피해는 국가가 배상할 수 없다(국가면책이론)는 등의 주장을 하다가 승소하기가 어렵다 싶으면 한일협정의 청구권 조항을 들어 배상을 거부한다는 것이 대일 소송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국내외 학자들과 법률가들의 해석은 이와는 크게 다르다.
문제의 조항에 대해 전문가들은 한국인이 일본 정부 및 기업을 상대로 청구권을 행사할 때 한국 정부의 ‘자국민에 대한 외교적 보호권’(정부가 개인의 재판을 도와 줄 수 있는 권리)만을 포기한다는 뜻이지 개인의 청구권까지 박탈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일본 정부 역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원폭 피해에 관한 대미(對美) 청구권을 포기했지만 이에 항의하는 피폭자들에겐 개인의 청구권은 여전히 살아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가해자 또는 피해자라는 자신들의 위치에 따라 ‘이중 기준’을 설정하고 있는 셈이다.
또 협정 문안에 명시된 징용과 징병은 일본 측에 더 이상 책임을 물을 수 없다 하더라도 원자폭탄 피해자와 군위안부 문제 등은 한일협정 당시 논의조차 되지 않은 사안이어서 개인의 청구권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주장도 많다.
더욱이 군위안부와 같은 중대한 인권침해 범죄는 국가가 어떤 협약으로도 자국민에 대한 외교적 보호권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게 국제법 학자들의 견해다. 이를 부정하는 어떤 협약도 국제법상 ‘공리법 위반(Jus cogens violations)’에 해당돼 원천무효라는 것.
반면 소수지만 한일협정의 관련 조항을 들어 일본 측에 더 이상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한국 정부 역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보상 요구를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한일협정 당시 피해자들의 청구권을 활용해 일본 측에서 3억 달러의 무상원조를 받아 낸 뒤 경제개발에 투입한 사실이 이번 문서를 통해 공식 확인됐기 때문이다.
▽보상 전망=일본 정부 및 기업, 한국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보상할 책임이 있다 하더라도 구체적으로 어떤 피해에 대해, 얼마나, 어떤 식으로 보상이 이뤄질 수 있을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협정 문안의 해석을 둘러싼 논란이 많고, 보상의 주체 및 내용, 액수 등에 대해서도 한일 양국 정부가 다른 주장을 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또 피해자들이 과연 60년 전의 피해에 대한 근거를 제대로 댈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피해자들이 대부분 팔순 이상의 고령으로 갈수록 줄어드는 것도 큰 문제다. 200만∼400만 명으로 추정되는 피해자 가운데 생존자는 4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태평양전쟁 피해자들의 소송을 맡고 있는 장완익(張完翼) 변호사는 “이번에 공개된 5건의 문서만으로는 어느 쪽에 얼마나 책임이 있는지 판단하기 어렵다”며 “책임의 소재를 가릴 수 있도록 나머지 문건도 모두 공개해 가능한 한 빨리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하종대 기자 orionha@donga.com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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