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교포 작가 유미리 씨(36)는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자신의 일기를 2002∼2003년 일본 문예지 ‘신초 45’에 연재한 뒤 책으로 펴냈으며 이 책은 최근 국내에 ‘그 남자에게 보내는 일기’(동아일보사)로 번역돼 나왔다.
유 씨는 10대 후반 연극단의 연구생으로 있을 때 연출가 히가시 유타카에게서 자기 운명을 여는 충고를 받았다. “자네는 연기보다 글을 쓰는 게 좋을지 모르겠어. 일기장을 극장이라고 생각하고 하루하루 드라마를 써 보게.” 유 씨는 배우를 지망하고 있던 터라 상처를 받았지만 히가시에게 꼬박꼬박 일기를 보여 줬고, 결국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번 일기 출간과 관련해 유 씨와 e메일로 인터뷰했다. 일본어 번역은 송현아 씨(서강대 강사)의 도움을 받았다.
우선 “히가시는 당신한테 어떤 사람이었느냐”고 물었다. 이 일기는 바로 ‘그 남자, 히가시’에게 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에 따라선 사제지간이고, 연인 사이, 부녀(父女), 라이벌이기도 했습니다. (중략) 하지만 그를 잃었던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지요. ‘히가시 유타카는 나 자신이었구나.’ 지금도 나는 그날 그를 잃음으로써 나 자신을 땅 속에 묻었다고 생각합니다.”
히가시는 유 씨가 아쿠타가와상 등을 받으며 우뚝 일어서던 2000년 4월 식도암으로 숨을 거뒀다.
이번 일기는 2001년 11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유 씨의 기록으로 이 기간에 온갖 일들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 시기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질문에 유 씨는 “아들이 단어를 기억하고 나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시기”라고 답했다.
이 아들은 유 씨가 한 방송기자와 사귀던 시절 갖게 돼 2000년 1월 출산했다. 유 씨는 그 방송기자와 출산 전에 헤어졌지만 말기 암 상태였던 연인 히가시는 “꼭 그 아이를 낳으라”고 말했다. 유 씨와 어린 아들이 나눈 온갖 희로애락을 읽어 가면 우리가 쓰지 않고 있었던 감정선(線)이 소생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아들은 (죽어서 흙에 묻어 준) 금붕어를 향해 말을 걸었다. ‘내일 만나자. 건강해지면 밖으로 나와.’ 뭔가가 목으로 치밀어 올랐다. 아들이, 죽음을 재생 가능한 것으로 파악하는 게 안타까웠다. (중략) ‘이 아이가 어느 나이가 될 때까지는 병으로도 사고로도 죽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는 내가 땅에 묻힌다 해도 ‘내일 만나자. 건강해지면 밖으로 나와’ 하면서 내가 돌아오길 기다리고만 있을까….”
“일기 가운데 가장 가슴 아팠던 날과 즐거웠던 날은 언제냐”는 질문에 유 씨는 “매일 슬픈 일과 기쁜 일이 생기고 그게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빠져나가는 느낌”이라고 답했다. 그는 다만 “그 같은 감정을 넘어 사건에 속수무책으로 휘말린 때는 (처녀작인) ‘돌에서 헤엄치는 물고기’가 (다른 사람의 프라이버시를 노출했다는 이유로) 최고재판소에서 출판금지를 받았을 때였다”고 말했다.
출판금지 판결을 받았던 날(2002년 10월 4일) 그는 일기에서 시종 ‘빙빙 돌아 어지럽다’고 쓰면서도 ‘정신안정제나 수면제를 입에 넣을 수는 없다. 정신적 동요는 내 힘만으로 막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아들의 단 하나뿐인 보호자다’라고 쓰고 있다.
유 씨는 “한국 독자들에게 이 책이 나온 후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오직 한마디뿐”이라며 “읽어 주세요”라고 답했다. 하지만 그녀가 이 부탁을 가장 간절히 하고 싶은 이는 하늘에 가 있는 그녀의 또 다른 분신 히가시 유타카가 아닐까.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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