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지식인의 自己修正

  • 입력 2005년 3월 21일 18시 20분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이 서울에서 ‘일본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 지지 의사를 밝혔을 때 나는 리영희(76) 선생의 회고록 ‘대화’를 읽고 있었다.

1991년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줄줄이 무너졌을 때 선생의 실망은 컸던 듯했다. 자본주의의 이기심(利己心)과 물신숭배가 싫어서 그 대안으로 사회주의에 희망을 걸었는데 이렇게 무너지다니…. 그는 고뇌했지만 용기 있게 자신의 오류를 인정했다. 회고록에는 그 대목이 이렇게 정리돼 있다. “인간의 이기심은, 인간의 생물적 속성으로, 제도 등으로 일시 억제할 수는 있지만 영구히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이 당시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20일로 이라크전쟁 개전 2주년을 맞았다. 중동에 민주주의의 씨를 뿌리고자 했던 미국의 목표는 어떻든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민주주의는 안 된다”고 했던 이슬람 세계의 한복판에 국민의 자유투표로 이라크 제헌의회가 구성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절대왕정 사우디아라비아에선 지방선거가 허용됐고, 종신대통령제 국가나 다름없는 이집트에선 야당 후보에게도 대선 출마의 길이 열렸다. 레바논에선 반(反)시리아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고,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자유투표로 온건파 인사를 아라파트의 후계자로 뽑았다.

▼리영희선생의 생각 바꾸기▼

중동을 휩쓸고 있는 이 민주화 바람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미국이다. “민주주의를 확산시켜 세계를 더 안전하게 만들겠다”는 부시 독트린과 그 실천으로서의 이라크전쟁이 사우디도, 이집트도 생각을 바꾸게 한 것이다. ‘피플 파워’도, ‘위로부터의 혁명’도 아닌 피(血)로써 증명해 보인 ‘아메리칸 파워’가 중동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진보적 지식인들은 좀처럼 이를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부시 독트린을 비웃고 이라크 파병에 반대했던 그들은 침묵하고 있다. 그들의 눈에는 런던과 로마에서 열린 부시 규탄, 반전(反戰) 시위만 크게 보인다. 물론 이라크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테러도 계속되고 있고 종족, 정파 간의 대립도 쉬이 완화될 것 같지는 않다. 좀 더 관망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행이나 행여 교조화된 관성적 반미(反美) 때문에 사실을 선별적으로 보려는 노력마저 안 하고 있는 것이라면 문제다. 미국이 개전의 한 이유로 내세웠던 대량살상무기는 나오지 않았지만 미국의 이니셔티브로 이라크와 중동에 민주화가 태동하고 있음은 사실 아닌가.

부시 독트린도 비웃음의 대상이 될 이유가 없다. ‘민주주의를 확산시켜야 세계가 더 안전해진다’는 논리는 ‘민주주의 국가끼리는 전쟁을 거의 안 한다’는 민주평화론(Democratic Peace Theory)에 확고히 기초하고 있다. 부시 독트린을,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조잡한 이론쯤으로 봐서는 곤란하다.

칸트의 영구평화론에 뿌리를 두고 있는 민주평화론은 몇 가지 반론에도 불구하고 냉전 종식 후의 국제질서를 설명하는 데 매우 유용한 담론이라는 데 이론(異論)이 없다. 국제정치학자 마이클 도일이 1986년 주장한 것처럼 민주국가끼리는 왜 전쟁을 덜 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민주국가에선 권력 분산, 견제와 균형, 국민적 합의와 같은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때문에 전쟁을 하고 싶어도 쉽게 못하는 것이다(현인택, 민주평화와 동아시아의 미래, 1996).

▼‘습관성 反美’론 현실 못봐▼

그렇다고 부시 독트린에 내재된 제국주의적 속성까지 부인하는 것은 아니나 중동의 모든 국가들이 민주화된다면 그만큼 전쟁도 테러도 줄어들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맹목적 친미(親美)도 문제지만 ‘습관성 반미’로 인해 사안의 양면성, 다면성을 보지 못하거나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것은 재앙이다. 그런 외눈으로는 요즘처럼 한미일이 격동하는 동북아 정세 속에서 우리의 활로를 찾기 어렵다.

“지난날보다 더 지혜로워져야 한다. 이젠 이분법이 잘 통하지 않는다. 상황이 달라지면 지식인은 자기수정을 해야 한다.” 리영희 선생이 회고록을 내면서 후학들에게 한 말이다.

이재호 수석 논설위원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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