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가 서울에 온다.
그는 199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뒤에도 첫 방문지로 한국을 택했다. 그는 1995년 2월 서울에서 가진 강연에서 5년 전 처음 한국을 찾았을 때의 경험을 들려줬다.
그는 “입국 금지자 명단에 오른 탓에 김포공항에서 3시간을 기다려 정치적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서야 입국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독재정권 시절 김지하 시인을 구명하기 위해 농성에 참가하거나 베트남전 반대운동에 뛰어들었던 이력이 말해주듯 그는 소설가이면서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겸비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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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도쿄(東京) 중심에서 멀리 벗어난 고즈넉한 주택가에 자리한 그의 자택을 두 번 째로 찾았다. 그는 반갑게 필자를 맞아주었다. 이번에는 부인 유카리 여사와 장남 히카리 씨도 함께였다. 어떤 강연에선가 그는 “일본인이 ‘너그럽고 점잖은’ 국민이었으면 한다”는 소망을 피력했다. 이방인의 눈에도 그는 늘 ‘너그럽고 점잖은’ 일본인이었다.
노작가가 먼저 꺼낸 화제는 독도였다. 이 문제를 애써 다루지 않았던 일본 언론들이 한국 내의 반발을 막 보도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반세기 이상 ‘지혜롭게’ 처리해 온 영토문제가 예전과는 다른 형태로 불거진 배경을 그는 일본 내 정치상황의 변동에서 찾고 있는 듯했다.
필자는 그와 일본어로 대화했다. 독도에 관한 대화 내내 그는 독도를 ‘그 섬’이라고 지칭했다. 일본어의 생리 구조에서 ‘다케시마’라는 고유명사는 지극히 자연스런 것이었음에도 그는 의식적으로 보통명사로 바꿔 사용했다. ‘다케시마’라고 말하는 순간 영유 의지가 작동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노작가의 세심한 배려가 황송할 정도로 부담스러웠다.
그는 올해로 만 70세를 맞이했건만, 작가이자 진보적 지식인으로서 곧추세워 온 자세가 흐트러진 구석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왕성하게 쓰고 발언했다. 집필실 겸 거실로 쓰는 방 곳곳에 그가 세계와 끊임없이 교통하고자 하는 흔적이 서려 있었다. 솔 벨로의 최신작을 두툼한 원서로 읽고 그 감동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그는 영락없는 문학청년이었다. 얼마 전 일본어로 번역된 황석영의 소설이나 중국 작가 모옌 등 아시아 작가들의 작품도 꼼꼼히 읽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장편소설이 될지도 모르는 작품을 쓰고 있다”고 했다. ‘안녕, 나의 책들이여’라는 예사롭지 않은 제목에서부터 ‘마지막’이라는 말의 무게가 전해져 온다. 소설 집필 외에 그가 중요한 일로 삼고 있는 것은 ‘9조의 모임’ 활동이다. 전쟁 포기를 선언한 일본 헌법 9조를 개정하려는 정치권에 맞서 평화헌법 수호를 일반에게 호소하는 시민운동이다. 일반시민 대상의 강연회가 중심인 이 운동에는 오에 외에도 평론가 가토 슈이치(加藤周一), 철학자 쓰루미 온스케(鶴見俊輔) 등 지식인들이 참여하고 있다. 비록 국회의원 3분의 2의 동의를 얻어 개정안이 성립되더라도 국민투표에서 부결시키자는 운동이다.
요즘 그가 자주 쓰는 표현은 ‘새로운 사람’이다. 2003년에 발표한 판타지 소설 ‘200년의 아이들’에는 이런 대화가 나온다.
“어느 시대이든 정치 경제 언론계에서 권력을 쥔 세력들은 이런 종류의 ‘새로운 사람’을 만들려고 하지. 그런데 이런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 번영한 국가는 언제고 오래가지 않았어. 주변 나라들을 비참하게 만들어놓고, 망한 거지. (중략) 이 나라도 내가 열 살 되던 해 전쟁에 질 때까지 그랬어. 그런데 지금 다시 한번 해 보려고 하는 세력이 등장한 거야. 내가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런 틀에 박힌 인간과는 다른, 자립해 있으면서도 서로 협력할 수 있는 진정한 ‘새로운 사람’이 되어 달라는 것이야. 어떤 ‘미래’에 있어서도.”
극우 진영이 오에를 조롱과 비난의 뜻으로 불러온 ‘전후 민주주의자’라는 호칭은 그의 문학적 입장을 오히려 잘 대변한다. 그는 ‘애매한 일본의 나’라는 제목의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그에 앞서 196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일본적 미학’의 자기도취를 비판했다. “그러한 ‘자기’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일본인을 ‘애매한’ 고립된 존재로 만들었고, 그러한 고립상황에서 아시아에 대한 침략이 행해졌다”는 것이다. ‘일본인’이기에 앞서 ‘세계 시민’이고자 하는 것이 오에 문학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오에는 일본의 폐쇄적 정치 문화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애매한’이란 말을 써왔다. 그러나 그가 지적하듯이 ‘애매한’이라는 형용사는 극우세력에 의해 정반대의 방향으로 쓰이고 있다. 예컨대 군대를 갖고 있음에도 교전권을 갖고 있지 않는 현재 일본의 ‘애매한’ 국가체제를 바꿔야 한다는 개헌론이 그것이다.
극우 회귀 흐름의 근간을 이루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은 ‘자학(自虐)사관’을 극복한 새 역사교과서를 통해 일본 역사에 긍지를 갖는 ‘새로운 사람’을 만들고자 한다. 표현은 동일하지만 의미는 판이하게 다르다. 오에가 마지막 희망을 걸어 설파하는 ‘새로운 사람’이라는 말을 새겨들으며, 작가란 언어의 의미를 쟁탈하는 싸움판에 몸을 내던지는 고독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 식구가 사는 아담한 집 안에는 따뜻한 공기가 감돌았다. 유카리 여사는 그림을 그린다. 어린이와 동물들이 등장하는 동화 풍의 삽화가 많다. 선천성 장애를 지닌 장남 히카리 씨는 작곡을 한다. 그가 낸 CD는 클래식부문 일본 골든 디스크 대상을 받기도 했다.
방문객이 집을 나설 때, 노작가가 일어서며 옆 테이블에서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던 히카리 씨에게 “‘사요나라’를 한국어로 뭐라고 하지”하고 물었다. 힘겨운 발성 속에서도 “안·녕·히·가·세·요”라는 한국어가 또렷하게 들렸다. 대문을 나서면서 이 집의 가족들은 ‘완전한 평화’의 이상에 대해 할 말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쿄=윤상인 한양대 일본언어문화학부 교수 (일본 교토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객원교수)
○오에 겐자부로는…
△1935년 일본 시코쿠 에히메 현에서 출생
△1957년 도쿄대 불문과 재학 중에 ‘사자(死者)의 사치’로 데뷔
△1958년 ‘사육(飼育)’으로 아쿠타가와 상 수상
△1963년 ‘성적 인간(性的人間)’ 발표
△1964년 ‘개인적 체험’ 발표
△1994년 ‘만연원년의 풋볼’로 노벨문학상 수상
▼오에 문학세계▼
오에 겐자부로는 일본의 전후 문학가 중에서도 가장 폭넓게 서양문학을 가까이 해 온 작가다. 프랑스의 장 폴 사르트르와 러시아의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미국의 윌리엄 포크너의 작품들을 탐독했다. 그의 초기 단편소설에는 프랑스의 소설가 피에르 가스카르의 영향이 엿보인다.
그는 도쿄(東京)대 불문과를 나왔다. ‘번역 투의 문체’라는 비판에 대해 그는 일본어를 ‘정확하게’ 쓰고자 한 노력의 결과라고 응수한다. 보편적 가치를 우선하는 문학관에서 나온 말이다.
‘죽은 자의 사치’(1957년) ‘사육’(1958년) 등 사회적 약자의 무력감을 그린 초기 단편에는 전후 현실을 살아가는 20대 작가의 어두운 내면이 담겨 있다. 1960년대에 쓴 ‘세븐틴’ ‘정치소년 죽다’에서는 민주주의 시대에 천황제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 히로시마를 취재한 체험을 바탕으로 쓴 ‘핀치런너 조서’(1976년) ‘치료탑’(1990년) 등에는 인류의 종말과 구원에 대한 성찰을 담았다.
신화적 방법을 즐겨 사용하는 것도 오에 소설의 두드러진 특징.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만연원년(萬延元年)의 풋볼’(1967년)도 신화의 틀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규명하려 한 작품이다. 시코쿠(四國) 산골 마을로 귀향한 형제가 그곳에서 자신들의 증조부 세대가 100년 전(1860년·萬延元年)에 일으킨 농민폭동의 역사에 자신들의 현실을 투영함으로써 ‘현재’의 의미를 묻는 장대한 상상력과 역사인식이 돋보인다.
이 작품에서부터 고향인 시코쿠의 숲이 소설의 무대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장애아 출생의 고통과 절망, 재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개인적 체험’도 오에의 문학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소설이다.
:알림:
‘7080 그때 그시절…’은 기사 넘쳐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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