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밍위안 입구에는 가로 25m 세로 2.5m, 정도의 ‘무망국치기념비(毋忘國恥紀念碑)’가 서 있는데, 1860년 10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침공과 약탈에 대한 부끄러움을 결코 잊을 수 없다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부끄러운 역사를 자세히 기록한 중국인의 역사인식과 교육관에 다시 한번 탄복했다.
중국은 1840년 제1차 아편전쟁 이후 100여 년 동안 서양 여러 나라와 일본에 침략당하며 수많은 문화재를 빼앗기거나 헐값에 팔아넘겨야 했다.
1842년 난징(南京)조약에 의한 문호개방 이후 서구 열강은 마음 놓고 중국을 드나들면서 값비싼 문화재를 발굴 도굴 매입이라는 형태로 가져갔다. 특히 1860년 10월 영-프 연합군이 톈진(天津)과 베이징을 완전히 점령한 뒤 이허위안(이和園)과 위안밍위안의 문화재를 강탈하고 파괴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궐을 능가한다는 위안밍위안의 웅장한 석조건물들이 당시 모두 파괴됐고 도자기 서화 공예품 고문서 등은 철저히 약탈당했다. 그때 파괴된 석재들은 아직도 그대로 나뒹굴고 있다.
1900년대 초로 들어서면 상황은 더욱 비참해진다. 1900년 8월 베이징 의화단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8개국 연합군이 떼로 몰려들어 문화재를 약탈해갔고, 일본은 만주사변(1931년)과 중일전쟁(1937∼1945년) 때에도 마음 놓고 훔쳐갔다.
1902년부터 1914년까지, 중국인들식으로 말하자면 ‘문화재 대도(大盜) 4인방’이 둔황(敦煌)과 실크로드 일대를 답사하며 고문서 벽화 불경 불상 수백 상자씩을 실어갔다. 영국의 마크 아우렐 스타인, 미국의 랭던 워너, 프랑스의 폴 펠리오, 일본의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가 그들. 이들이 가져간 유물 중에는 신라 고승 혜초(慧超·704∼787)가 둔황에서 쓴 인도여행기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도 들어 있다.
이들이 가져간 중국문화재는 지금 영국 런던 대영박물관,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과 기메 박물관, 미국 하버드대 박물관, 일본 도쿄 국립박물관, 인도 뉴델리 국립박물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오타니가 조선총독부에 기증한 373점) 등에 흩어져 있다.
1976년 중국정부는 위안밍위안 관리처를 만들고 30년 내에 파괴된 위안밍위안을 옛 모습대로 복원할 계획을 세웠다. 또 해외 주요박물관 200여 곳에 있는 160만 점의 중국문화재에 대해 유네스코와 해당 정부를 통해 반환요청을 했다. 민간단체인 ‘해외유실문물긴급구조기금회’는 크리스티와 소더비 등 각종 경매를 통해 유물을 사들이고 있다. 신흥 부자들도 해외에서 자국의 문화재를 사는 행렬에 동참하고 있다.
중국 정부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이는 세계적으로도 엄청난 일이 되겠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일은 쉽지 않을 것으로 점쳐진다. 우선 유물 반환요청을 들어줄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 흩어진 유물들을 모두 본국에 반환해야 된다면 온 세계가 혼란에 빠질 것이다.
한국도 해외소장 한국 문화재 반환과 조사 구매사업을 벌이고 있지만 이제 걸음마 수준이다. 그러나 하다못해 중국의 신흥 부자들이 자국의 유물을 사들이고 있는 점은 배울 만하다고 본다. 우리도 민간기업이나 개인이 앞장서 유물을 되사들이고 국가가 물밑에서 지원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허영환 서울시 문화재위원·중국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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