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첫 日육사생도 ‘박유굉의 묘’ 강제 철거위기

  • 입력 2005년 6월 2일 03시 28분


개화의 꿈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갑신정변 실패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박유굉의 묘와 일본에서 징용희생자 추모활동을 벌이는 김창진 씨. 도쿄=박원재 기자
개화의 꿈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갑신정변 실패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박유굉의 묘와 일본에서 징용희생자 추모활동을 벌이는 김창진 씨. 도쿄=박원재 기자
일본 도쿄(東京) 시내 아오야마(靑山) 묘역에 있는 대한제국 말 개화파 정치인 김옥균(金玉均·1851∼1894) 묘가 관리비 체납으로 강제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주일 한국대사관이 이를 대납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묘에서 10m쯤 떨어진 곳에 ‘박유굉(朴裕宏)’이라는 한국인의 묘비가 역시 무연고 상태로 방치돼 있다. 3단 기단 위에 1.3m 높이로 세워진 비석 앞면엔 ‘오호 박유굉지묘(嗚呼 朴裕宏之墓)’, 뒷면엔 ‘타루비(墮淚碑·눈물을 흘리는 비)’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기록에 따르면 박유굉(1867∼1888)은 한국인 최초로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생도가 된 인물로 본관은 반남(潘南). 1882년 조선 조정이 임오군란에 대한 사과의 뜻으로 박영효(朴泳孝)를 대표로 하는 수신사를 일본에 파견했을 때 수행원 자격으로 일본에 갔다가 눌러앉았다. 그는 게이오(慶應)의숙과 일본유년학교를 거쳐 1886년 일본의 선진 군사학을 배우기 위해 일본 육군사관학교 보병과에 들어갔다.

하지만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 유학생들에 대해 학자금 중단과 귀국 조치가 내려지고 동료 유학생들이 귀국 후 처형당했다는 등의 소식이 전해지자 1888년 5월 기숙사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정확한 자살 이유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당시 주변에서는 조국의 쇠락과 자신의 나약함을 비통히 여겨 목숨을 끊은 것으로 해석했다.

후배 유학생들은 1900년 박유굉의 넋을 위로하는 비석을 세우며 ‘타루비’라는 글귀를 새겼다.

박유굉의 묘는 김옥균의 묘와 마찬가지로 관리비를 장기간 체납한 탓에 무연고 묘로 지목돼 10월까지 묘역 사용권자 혹은 후손이 나타나 사용신청을 갱신하지 않으면 강제 철거된다.

일본에서 징용희생자 추모활동을 벌이고 있는 김창진(金昌鎭·60) 씨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에도 신경을 써야겠지만 박유굉처럼 한을 품은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사람들의 자취도 보존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도쿄=박원재 특파원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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