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만남’에서 우정으로=예일대를 졸업하고 해군에 입대해 중위로 근무하던 나(우드워드)는 1970년 문서 전달차 백악관에 들렀다가 대기실에서 어떤 신사 옆에 앉게 됐다.
제대 후 진로문제를 고민하던 상황이어서 그 신사에게 말을 걸면서 조언을 구했다. 우리는 곧 대학원(조지워싱턴대) 동창임을 알게 됐다.
작은 신문사에 다니고 있을 때도 틈만 나면 그에게 전화를 걸었고, 집에 찾아가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처럼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신문사에 대해서는 “깊이가 없다”고 평가했다. 그때 나는 펠트 씨가 언젠가는 (심층기사를 쓰는 데)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971년 워싱턴포스트 입사 후 펠트 부국장에게 자주 전화를 걸었다. 어느 날 그는 스피로 애그뉴 부통령이 사무실에서 뇌물로 2500달러를 받았다는 정보를 알려줬다. 하루 종일 취재했으나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런데 2년 뒤 사실로 밝혀져 애그뉴 부통령은 사임했다.
1972년 대통령후보 경선에 나섰던 조지 월리스 앨라배마 주지사가 저격당해 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저격범은 현장에서 체포됐다. 펠트 부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그는 “저격범이 다른 후보도 살해하려고 했다”고 알려줬다. 이 기사는 1면 톱을 장식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딥 스로트로=1972년 워터게이트 사건 취재 중 범인의 수첩에 적힌 하워드 헌트라는 인물을 추적하면서 펠트 부국장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사무실로 전화하는 것은 딱 질색”이라며 “(그 사안은) 뜨거운 쟁점이 될 것”이라고만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는 신경이 날카로웠다. 그는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를 전제로 “헌트가 주요한 용의자다”라고 말했다.
또다시 펠트 부국장과 접촉하려 했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집으로 찾아갔다. 그는 “절대 전화를 해서는 안 된다”며 스파이들이 사용하는 접선방법을 가르쳐줬다.
그는 “평소엔 당신 아파트 커튼을 닫아놓아라. 어느 날 커튼이 열려 있으면 만나자는 신호로 알겠다”고 제안했다. 나는 다른 제안을 했다. 급히 만날 필요가 있으면 빨간 깃발을 꽂아놓은 화분을 발코니 앞쪽에서 뒤쪽으로 옮겨놓겠다고 말했다. 그날은 지하주차장에서 오전 2시에 만나기로 했다. 그가 어떻게 아파트 발코니를 관찰했는지는 지금도 미스터리다.
그는 중요한 일이 있으면 우리 집에 배달되는 뉴욕타임스 신문 20면에 시곗바늘을 그려 만날 시간을 알려 주겠다고 했다.
▽펠트 부국장의 제보 동기는?=워터게이트처럼 경쟁이 치열하고 복잡한 사건에서는 취재원의 동기를 생각해볼 시간이 없다. 정보가 사실인지가 중요할 뿐이다.
펠트 부국장이 왜 위험을 무릅쓰고 그랬을까 생각해본 것은 나중 일이다. 펠트 부국장은 FBI 파일의 일부를 유출해 리처드 닉슨 대통령을 압박하려 했다. 그는 그것이 FBI 조직을 보호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는 닉슨 대통령이 정치적 이유로 FBI를 조종하려는 것을 경멸하고 있었다.
또 에드거 후버 국장 사망 후 외부에서 닉슨 충성파 인사가 FBI 국장으로 임명되자 그는 충격을 받았다. 펠트 부국장은 자신이 후버의 후임자가 돼야 한다고 믿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스파이 업무를 관장했던 그는 게임을 좋아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나는 ‘그의 요원(agent)’이었는지 모른다. 실제로 스파이 교육하듯이 나에게 비밀 준수 등 여러 가지를 가르쳤다.
펠트 씨에게 (왜 제보를 했느냐는) 의문을 제기할 때면 그는 늘 같은 대답을 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이 일을 해야만 한다.”
한편 우드워드 부국장은 이날 워싱턴포스트 인터넷판과 별도 인터뷰를 갖고 “펠트 부국장이 제공한 정보 중에 때로는 틀린 내용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잘못된 정보를 제공한 것이) 고의인 것으로 추측된다”며 “당시는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다”고 덧붙였다.
공종식 기자 kong@donga.com
송평인 기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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