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드 로비앙 교육장관은 이날 파리 교외의 크레테유 고등학교를 찾았다. 그는 취재진이 보는 앞에서 사회계열 수험생을 위한 문제 중 ‘인간의 정치적 행동을 이끌어가는 것은 역사인식인가’라는 주제를 택해 즉석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답안을 제시했다.
“이 주제는 역사적 결정론에 관한 문제, 즉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역사적 유물론이란 환상에 관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역사적 유물론이 진리가 아님을 알고 있다. 인간은 행동의 자유를 갖고 있다. 인간 행동은 미리 결정되지 않는다. 인간이 정치적인 것은 인간이 무언가를 그대로 반영(copier)하는 존재가 아니라 무언가를 새로 만들어내는(impulser)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험을 치르는 것은 학생들이지만 바칼로레아 철학시험이 치러진 날 저녁이면 프랑스 국민 사이에서는 이런 식으로 논술 주제를 놓고 열띤 토론이 벌어진다. AFP통신은 이런 사정을 감안해 ‘바칼로레아 철학시험 논술 제목’이라는 제목 아래 논술 주제들만 나열한 기사를 내보내기도 한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바칼로레아는 크게 일반계 기술계 직업계로 나뉜다. 대학에서 인문 사회 자연과학 등을 공부하려는 일반계 지망생에게 철학시험은 필수다. 일반계 철학시험은 다시 인문, 사회, 자연계로 나뉘어 출제된다. 문제는 계열마다 3개씩 출제되는데 수험생들은 이 중 하나를 선택해 4시간 안에 답안을 작성해야 한다. 화두(話頭)를 제시하는 형식의 문제 2개와 철학자의 텍스트를 제시한 뒤 설명을 요구하는 형식의 문제 1개가 출제된다.
특히 고등학생들은 경제나 역사를 철학과 결합시키는 몇 가지 방법론을 학교에서 배우기 때문에 대부분 이를 이용해 논지를 전개할 것을 요구하는 문제들이다.
그동안 제시된 철학자의 텍스트로는 주로 데카르트 칸트 흄 등 16∼18세기 철학자들의 고전적인 예문이 대부분이었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 철학자 또는 카를 포퍼,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같은 현대 철학자의 글도 간혹 등장했다.
올해 논술의 화두는 인문계에서 ‘정의냐 부정의냐는 관습적으로 구별될 뿐인가’ ‘언어는 상호 소통을 위한 수단일 뿐인가’란 주제, 사회계에서 ‘인간은 기술(技術)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인간의 정치적 행동을 이끌어가는 것은 역사인식인가’라는 주제, 자연계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다는 뜻인가’ ‘예술작품에 대한 감수성은 훈련을 필요로 하는가’라는 주제 등이었다.
프랑스의 일간 르 피가로는 이날 ‘자유롭다는 것은 아무런 방해도…’라는 문제에 대해 올해 초 고등학생들이 바칼로레아 시험방식 개선을 비롯한 정부의 교육개혁안에 반대해 거리 시위를 벌인 사실을 염두에 둔 것이라며 당시의 경험을 토대로 답안을 작성하라는 요구가 엿보이는 문제라고 평가했다.
바칼로레아는 대학입학 자격이 주어지는 고등학교(lyc´ee) 졸업 학위(diplome)로 1808년 나폴레옹 집권 당시 시작돼 200년 가까운 전통을 갖고 있다. 합격률은 1945년 3%, 1975년 25%, 2004년 62%로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그러나 엘리트 배출 학교인 그랑제콜에 입학하려면 고득점을 얻어야 한다.
송평인 기자 pisong@donga.com
파리=금동근 특파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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