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는 한국인 희생자 430여 명(북한 출신 82명 포함)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올해엔 김상원(金相元) 진영하(秦英河) 곽영선(郭泳先) 등 3명의 이름이 추가됐다. 김상원 씨의 딸로 오카야마(岡山) 현에서 찾아온 김능자(金綾子·68) 씨는 자신이 여덟 살 때 징용으로 끌려가 불귀의 객이 된 아버지를 위해 꽃다발과 담배 한 개비, 홍차 한 잔을 따라 올리며 눈물을 찍어냈다.
오키나와 및 남태평양 지역 전몰자 23만여 명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있는 이곳에는 이날 일본 전국에서 모여든 유족들로 크게 붐볐다. 일본 언론들은 한국인 유족들이 추도식을 마친 뒤 태극기 앞에서 목청껏 애국가를 부르는 모습을 취재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는 이날 정오 별도의 식장에서 유족과 오키나와 주민 등 5000여 명이 참석한 추모식에 참석해 “주일미군의 전쟁 억지력을 유지하면서도 오키나와를 비롯한 (미군 주둔지의) 지역 부담을 경감하는 방향으로 미국 정부와 협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평화공원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의 한 자연동굴 앞에서는 간호사로 징발돼 일본군과 함께 이곳에 숨어 있다가 집단 자살한 여고생들을 추모하는 모임이 열렸다. 당시 고교 1년생으로 동창생 10명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오시로 마사코(大城政子·77) 씨는 “동굴에 숨어 지내던 어느 날 물을 뜨러 가는데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길 한쪽에 한복 차림 여성 2명이 앉아 나를 보며 ‘아이고, 아이고’ 울부짖던 모습이 기억난다”고 말했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왔던 한국인 여성들이 최후의 순간이 임박하자 간수해 온 한복을 꺼내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시로 씨는 “살아남은 자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학교에서 초청하면 언제든 달려가 전쟁 체험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면서 “전쟁은 살인의 연속일 뿐, 이겨도 져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라며 평화로운 세계를 기원했다.
박봉상(朴鳳祥·65·전 영신고 교장) 유족회 회장은 “부친이 오키나와에서 숨졌다고 기록된 서류가 일본 쪽에서 한국 정부로 넘겨진 사실을 오랫동안 모르고 있었다”면서 “광복 후 60년이 지나도록 유족의 비통한 심정을 무시해 온 한국 정부의 책임도 크다”고 말했다.
:오키나와 전쟁:
일본군은 연합군의 반격으로 본토가 위협받자 시간을 벌기 위해 1944년 3월 오키나와에 방어군(제32군)을 창설해 지구전 태세에 들어갔다. 한국인 징용자와 주민을 동원해 군 시설을 지하호로 이전했다. 1945년 4월 1일 연합군 54만8000여 명이 상륙해 시작된 지상전은 6월 23일 총사령관이 자결함으로써 82일 만에 끝났다. 일본군 9만4000여 명, 미군 1만2520명, 민간인 9만4000여 명이 숨졌다. 한국인 징용자 다수도 보복을 우려한 일본군에 피살되거나 전투에 휘말려 숨졌다.
마부니(오키나와)=조헌주 특파원hanscho@donga.com
▼“오키나와人 전쟁피해의식 韓-中과 같아”▼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역사 왜곡 교과서, 각료들의 거듭된 실언 등은 전후 60년이 되도록 전쟁 책임을 확실히 정리하지 못한 일본 측 책임입니다.”
1949년 참혹한 전쟁의 교훈을 잊지 말자는 취지로 창간된 오키나와 최대 일간지 ‘오키나와 타임스’의 나가모토 도모히로(長元朝浩·55·사진) 편집국장은 “침략전쟁을 일으킨 나라가 피해국가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국제적인 예의”라며 “일본 정부는 이를 ‘내정간섭’이라고 일축해 국제적 신뢰와 신의를 얻지 못하는 외교 부재 상태”라고 비판했다.
그는 “일본이 피해국인 한국 중국과 진정한 친구가 되지 못하는 한 아시아의 안정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역사교과서 보급 움직임에 대해 “전쟁의 참상을 겪은 오키나와 사람들이 볼 때 그런 움직임은 역사 날조에 가까운 것”이라며 “오키나와인들은 한국 중국인들과 같은 시각에서 그런 교과서가 채택되지 않도록 적극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하(오키나와)=조헌주 특파원 hans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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