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10일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는 뜨거웠다. 40도를 넘나드는 불볕더위와 함께 민주화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이 거리를 달구고 있었다. 시내에서 마주친 시민들은 아스카르 아카예프 전 대통령의 독재정부를 올 3월 ‘레몬혁명’으로 축출한 것과 이번 선거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게 된 데 대한 자부심이 넘쳤다. 2003년 그루지야의 ‘장미혁명’과 지난해 우크라이나의 ‘오렌지혁명’에 이어 옛 소련지역에서 세 번째로 국민의 힘으로 민주화에 성공한 기록을 세운 것이다.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등에서 파견된 1300여 명의 국제선거참관인단의 감시 속에서 치러진 이번 선거는 중앙아시아 최초의 자유롭고 민주적인 선거로 평가되고 있다. 1991년 옛 소련에서 독립한 후 한결같이 장기집권과 철권통치가 계속되고 있는 중앙아시아 5개국에서는 지금까지 선거다운 선거가 치러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 후보 6명은 사상 처음으로 TV 토론을 벌인 데 이어 265만 명의 유권자들은 전국 2182개 투표소에서 차분히 투표를 마쳤다.
참관인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외교통상부 신성철(申性澈) 외무관은 “서구 기준으로 보면 미흡한 점도 있으나 전반적으로는 정상적인 선거가 치러졌다”고 밝혔다. 이번 선거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보여주듯 비슈케크에는 300여 명의 외신기자들이 몰려들어 치열한 취재 경쟁을 벌였다.
선거가 가지는 의미는 크지만 선거전 자체는 ‘싱겁게’ 진행됐다. 야당 지도자로 ‘레몬혁명’을 주도했던 쿠르만베크 바키예프 대통령 대행이 선거운동 기간 내내 큰 표 차로 앞서갔기 때문이다. 선거 결과는 11일 오후(한국 시간) 윤곽이 드러날 예정이지만 투표 시작 직전의 각종 여론조사에서 바키예프 대통령 대행은 60%가 넘는 지지율로 다른 후보들을 압도했다. 바키예프 측은 오히려 농촌지역의 낮은 참여 때문에 전체 투표율이 50%를 넘지 못해 선거가 무효가 되지 않을까 하는 점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 상황이다.
바키예프 대통령 대행의 가장 큰 라이벌로 꼽혔던 펠릭스 쿨로프 전 내무장관이 일찌감치 ‘바키예프 지지’를 선언하고 나선 것도 이번 선거를 ‘맥 빠지게’ 한 가장 큰 원인이 됐다. 쿨로프 전 장관은 바키예프 대행이 재집권할 경우 총리를 맡을 예정이다.
두 사람의 연대는 대선을 앞둔 정국을 안정시키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당초 일부 서방 언론은 “우즈베키스탄인이 많은 남부지역과 키르기스스탄인이 다수인 북부 지역의 대립으로 분열 가능성까지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남부 출신의 바키예프 대행과 북부 출신의 쿨로프 전 장관의 제휴로 이런 우려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
키르기스스탄 국민들은 이번 대선을 계기로 민주화와 안정으로 가는 큰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비슈케크=김기현 특파원 kimkihy@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