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 항공기와 함께 쓰는 활주로에는 C-5 수송기 등 미 군용기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미군 관계자의 움직임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2002년 4월 이곳에 왔을 때 공항 안팎이 미군 장병들로 북적대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시내의 하야트호텔이나 중앙백화점에서도 미군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미군 특수를 노리고 2, 3년 사이 문을 열었던 시내의 레스토랑과 나이트클럽들도 한산하다. 키르기스스탄 주둔 미군의 조심스러운 태도는 시민혁명으로 아스카르 아카예프 대통령이 하야하고 새 정권이 들어서는 격변 속에서 불필요한 정치적 오해를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몸 사리기’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에서 미군의 위상은 흔들리고 있다. 10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쿠르만베크 바키예프 신임 대통령이 미군 철수를 요구하고 나섰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을 겨냥한 대테러 전쟁이 일단락됐기 때문에 더 이상 미군이 머무를 명분이 없다는 것.
그러나 미국으로서는 러시아의 앞마당인 이 지역에 어렵게 확보한 교두보를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다. 도널드 럼즈펠드 미국 국방장관이 25일 키르기스스탄을 긴급 방문하는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키르기스스탄뿐 아니다. 이웃 우즈베키스탄의 하나바드 기지에 주둔한 800여 명의 미군도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러시아, 중국, 중앙아시아 4개국으로 이뤄진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들이 5일 “미군의 철수 시한을 밝히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리처드 마이어스 미군 합참의장은 “이러한 요구는 러시아와 중국이 나머지 회원국을 압박해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지역에서 순순히 떠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보인 것이다. 미국은 경제적인 대가를 앞세워 주둔 연장을 꾀하고 있다.
반면 미군의 진출로 위기감을 느꼈던 러시아는 최근 조금 느긋해졌다. 민주화 열풍에 위기감을 느낀 이 지역 기존 정권들이 미국보다 러시아를 선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화 움직임을 지지하는 미국과 달리 러시아는 “민주화는 당사국의 국내 문제”라며 결과적으로 기존 정권을 편드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소련 해체와 함께 중앙아시아 지역을 떠났던 러시아군은 2003년 9월 다시 키르기스스탄으로 돌아왔다. 미군의 간시 기지와 겨우 30km 떨어진 칸트 공군기지에는 500여 명의 러시아 공군과 수호이 전투기가 배치돼 있다.
치열한 미-러 대결의 틈바구니에서 중국도 레몬혁명 당시 ‘안정 확보’를 명분으로 파병을 검토하기도 했다. 중국 기업의 투자와 진출도 활발해지고 있다. 중앙아시아와 카프카스 지역은 미-러-중이 각축을 벌이는 ‘거대한 체스판’이 된 것이다.
▼독립국가연합 12개국 “성향대로… 헤쳐모여”▼
“어느 편에 줄 서야 하나?”
1991년 옛 소련 해체로 탄생한 15개국 중 발트 3국을 제외한 12개국은 독립국가연합(CIS)을 결성했다. 그러나 이 CIS는 최근 친러와 친미(친서방)로 나눠지면서 크게 흔들리고 있다.
탈(脫)러 친서방 노선을 추구하는 나라들의 모임이 ‘GUAM’이다. 그루지야(G)와 우크라이나(U) 아제르바이잔(A) 몰도바(M)의 맨 앞 글자를 딴 이름. 1996년 4개국으로 출발했고 1999년 합류한 우즈베키스탄은 5월 탈퇴했다. GUAM 정상회의는 가끔 역내가 아닌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나 미국 뉴욕 같은 서방 도시에서 열릴 정도로 친서방적 성격을 과시한다.
반면 친러 국가들은 군사동맹인 집단안보조약기구(CSTO)를 중심으로 뭉쳐 있다. 러시아와 벨로루시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아르메니아 등 6개국이 회원국. 친러 친서방의 대립 속에서 ‘눈치 보기’도 치열하다. 우즈베키스탄의 이슬람 카리모프 정권이 대표적인 예다. 카리모프 정권은 1990년대 중반부터 경제적 이득을 노리고 친서방 노선으로 돌아섰다. GUAM에 가입하고 표기문자를 종래에 사용해 오던 러시아와 같은 키릴문자 대신 영미문자인 로마자를 채택했으며 9·11테러가 일어나자 미군의 주둔도 허용했다.
하지만 그는 최근 다시 서방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15년째 철권통치를 계속하고 있는 카리모프 정권으로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서방의 간섭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CIS 지역에서 번지고 있는 민주화 움직임의 배후에 미국 등이 있다고 비난하면서 GUAM에서 탈퇴하고 ‘미군 철수’를 요구하고 나섰다.
비슈케크·타슈켄트=김기현 특파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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