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지성 신년 인터뷰]美 문단 돌풍 중국계 작가 하 진

  • 입력 2006년 1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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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최고 권위의 ‘펜포크너상’을 2차례나 수상하는 등 미국 문단에서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계 작가 하진. 20세에 처음 영어를 배운 그는 지금은 역량 있는 현역 작가이자 보스턴대 영문학과 교수이기도 하다. 보스턴=공종식  특파원
미국 최고 권위의 ‘펜포크너상’을 2차례나 수상하는 등 미국 문단에서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계 작가 하진. 20세에 처음 영어를 배운 그는 지금은 역량 있는 현역 작가이자 보스턴대 영문학과 교수이기도 하다. 보스턴=공종식 특파원
《2005년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와 영국 정치평론지 프로스펙트가 선정한 ‘이 시대 최고 지성 100인’ 중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지성들이 몇몇 눈에 띈다. 보스턴대 영문학과 교수로 있는 중국계 소설가 하진(哈金·49)도 그중 한 사람이다. 소설 ‘기다림(Waiting)’과 ‘전쟁쓰레기(War Trash)’로 미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펜포크너상’을 두 번씩이나 수상하긴 했지만 그가 ‘잘나가는 작가’를 넘어 지성 100인의 반열에 오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무엇이 중국 인민해방군 출신의 이민자인 하진을 시대의 지성으로 떠올린 원동력이었을까. 그를 만나 그가 세상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떠오르는 중국’에 대한 생각의 편린들을 들어봤다.》

성인이 돼서 한국말을 배운 뒤 한국어로 뛰어난 소설을 쓰는 외국인이 있다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요즘 미국 문단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중국계 작가 하진은 바로 이 같은 장벽을 극복했다. 미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펜포크너상’을 2차례나 수상한 그는 20세에 처음으로 영어를 접했다고 한다. 그는 더욱이 14세 때부터 6년 가까이 인민해방군에 복무하면서 중-소 국경 경비를 맡았던 ‘드문 경력’의 소유자다.

지난해 12월 그가 영문학과 교수로 있는 보스턴대를 찾았다. 만나자마자 영어에 대해 물어보았다.

―영어는 언제 처음 배웠습니까.

“군대 제대하고 철도회사에서 근무할 때였어요. 오전 5시부터 30분 동안 영어를 가르치는 라디오 방송이 있었어요. 방송을 들으면서 영문학을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했지요.”

―언어에 비범한 재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20세에 영어를 처음 배운 사람이 영어로 뛰어난 소설을 쓴다는 게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대학에 가 보니 저처럼 독학으로 영어를 배운 뒤 어렵기로 유명한 조지 엘리엇을 거침없이 읽는 동료가 많았어요. 중국은 문화혁명으로 대학이 문을 닫으면서 역설적으로 ‘재능의 축적’이 생겼어요. 저는 오히려 처음에는 영어를 싫어했지요.” ―14세에 군에 입대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모든 학교가 문을 닫은 상황에서 저 같은 시골 출신으로서는 군대에 가면 기회가 더 많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소련과의 전쟁이 발생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오히려 국가를 방위한다는 애국심도 있었습니다. 육체적으론 힘들었지요. 그러나 나쁘진 않았어요. 나중엔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심했죠.”

―어떻게 해서 미국에 정착하게 됐습니까.

“중국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1985년에 미국으로 건너와 브랜다이스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했어요. 그런데 1989년 ‘톈안먼(天安門) 학살(massacre)’이 발생했어요. 귀국을 포기했죠. 인민해방군에 복무까지 했던 저로선 인민에게 봉사해야 할 인민해방군이 인민을 죽였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당시 아들이 태어났는데 아이에게 그런 폭력의 악순환을 경험하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톈안먼 사태를 꼭 ‘학살’이라고 하는 그에게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중국 같은 나라가 사회 통합을 하기 위해서는 강한 통치력이 필요한 게 아닐까요. 현실적으로 지금 중국의 발전 단계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건 시기상조라는 지적도 있는데….

“물론 그런 주장에도 진실의 일부가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중국은 지금까지 민주주의를 해 본 적이 한번도 없어요. 봉건주의만 있었어요. 어떻게 해 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나요. 톈안먼 학살은 나이 든 사람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젊은이를 살해한 사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에요.”

―요즘 경제적으로 중국이 부상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오는데요. 중국이 슈퍼파워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중국은 여전히 가난합니다. 물론 부자가 많아졌어요. 그러나 소수에 불과하고 절대 다수는 아직도 가난합니다. 시골에 가 보세요. 사회 인프라도 아직은 갈 길이 멀어요. 가까운 미래에 슈퍼파워가 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너무 비관적인 것 아닌가요.

“아니에요. 그것은 ‘사실(fact)’이에요. 에너지 문제 해결도 이만저만 큰 문제가 아닙니다. 중국을 세계의 공장이라고 하는데 아직까지 첨단 분야에서는 뚜렷한 성과가 없어요. 인문학도 마찬가지예요. 여기 미국 대학도서관을 보세요. 문명은 축적이 필요해요. 수백 년이 걸립니다. 중국이 이전보다 잘살지는 몰라도 그것이 강대국을 의미하지는 않아요. 법치 확립을 비롯해서 가야 할 길이 멀어요. 무엇보다 민주주의를 하지 않고 있어요.”

―바람직한 한중일 3국 관계를 상정할 수 있다면….

“저는 정치가가 아니어서 잘 모르지만 3개국은 역사적으로 반목이 심했어요. 3국은 시장과 기술뿐만 아니라 서로 공유하고 협조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환경이 대표적인 분야지요. 서로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민자로서 보는 미국은 어떤가요.

“저는 여기서 20년 살았지만 여전히 외국인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아요. 이민자 국가인 미국은 ‘소외’가 본질이에요. 이라크전쟁 등 잘못된 정책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전체적으로는 관대한 사회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똑똑한 많은 외국 젊은이가 여기에 와서 공부를 하고 결과적으로 미국 발전에 기여합니다.”

―문학의 역할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소설이라면 우선 스토리가 좋아야 하지요. 인간의 풍부한 경험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어야 해요. 이상적인 책은 독자가 책을 모두 읽은 뒤 ‘인생이 더 풍부해졌다’고 느끼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는 2004년에 6·25전쟁 중 미군에 포로로 잡힌 중국 인민군의 고난과 갈등을 그린 ‘전쟁쓰레기’를 써서 펜포크너상을 받았다.

―‘전쟁쓰레기’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이 소설은 반전소설이에요. 전쟁이 개인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보여 주고 싶었어요. 종전 이후 만들어진 휴전선이 전쟁 직전의 38선이라는 점은 전쟁의 허망함을 잘 보여 주고 있어요. 무엇 때문에 수백만 명이 죽고 고통받았는지를 물어봐야 합니다. 전쟁은 광기예요.”

그는 기자가 최인훈(崔仁勳)의 소설 ‘광장’이 ‘전쟁쓰레기’와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전하자 꼭 찾아서 읽어 보겠다며 메모하기도 했다.

―혹시 한국 독자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너무 현실적이 되지 말라는 점이에요. 미국에서 많은 아시아계 젊은이가 장래 수입 등 안정성만을 기준으로 진로를 결정하는 것을 보고 답답할 때가 많아요. ‘인생에서 아무것도 확실한 것은 없다. 그냥 가슴이 원하는 것을 따르라(In life as a human being, nothing is secure. Just follow your heart)’고 말해 주고 싶어요.”

보스턴=공종식 특파원 kong@donga.com

●하진

△1956년 랴오닝 성 출신 △1970∼1976년 인민해방군 근무 △1981년 하얼빈 헤이룽장대 영문학 학사 △1984년 산둥대 영문학 석사 △1985년 미국 유학(브랜다이스대 영문학과) △1989년 톈안먼 사태 이후 미국 정착 △1993년 브랜다이스대 영문학 박사 △2005년 보스턴대 영문학과 교수 △주요 작품: 연못에서(1998) 기다림(1999) 전쟁쓰레기(2004)

■ 소설 ‘전쟁쓰레기’와 하진

“거의 완벽한, 독창적인, 강력하게 감동적인….”

6·25전쟁 중 미군에 포로로 잡힌 중국 인민해방군을 소재로 쓴 하진의 소설 ‘전쟁쓰레기’에 대해 까다롭기로 유명한 뉴욕타임스가 서평에서 극찬한 내용이다.

이 소설은 포로수용소에서 주인공이 경험한 포로 학대, 중국 인민해방군 포로들 사이의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갈등, 포로 교환 때 중국과 대만 사이에서 겪은 고뇌 등이 주된 줄거리. 특히 6·25전쟁을 한국이나 북한군, 혹은 미군이 아닌 중국군의 시각에서 묘사했다는 점 때문에 미국 문단에서 주목을 받았다. 이와 함께 소설이지만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상황을 섬세하게 묘사했다는 평가도 받았다.

하진은 한국 땅을 한번도 밟은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도 작품을 읽어 보면 한국의 음식, 산천에 대해 마치 한국 작가가 쓴 것처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진은 “군대에 있을 때 중국 내 조선족이 많이 사는 국경 근처에서 근무하여 한국 문화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며 “그때의 경험 때문에 김치를 지금도 좋아한다”고 말했다.

하진이 미국 문단에서 주목받는 이유는 ‘전쟁쓰레기’와 같은 소설에서 볼 수 있듯 미국 작가들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시각에서 소재를 다룬다는 점이다. 이와 함께 심각한 소재를 다루는 작품에서도 따듯함과 유머를 잃지 않고 있다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톈안먼 사태 이후 미국에 정착한 그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내용을 소재로 소설을 쓰기 때문에 아직까지 중국에서는 ‘기피 인물’이다. 하진은 톈안먼 사태 이후 아직까지 중국을 한번도 방문한 적이 없다. 그는 “미국 시민권이 나오기 전에는 중국 정부가 여권 재발급을 거부해 방문할 수가 없었다”며 “미국 시민권이 나온 지금은 방문할 수 있는 길은 열렸지만 과거처럼 그렇게 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전쟁 쓰레기’는 한국에서도 곧 번역본이 출판될 예정이다.

보스턴=공종식 특파원 k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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