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김기현]푸틴, 에너지 제국 ‘차르’ 꿈꾼다

  • 입력 2006년 1월 26일 03시 00분


“‘가스푸틴’ 물러나라.”

23일 밤 그루지야의 수도 트빌리시에 있는 그루지야 주둔 러시아군사령부 앞. 수백 명의 시민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심술궂게 그린 캐리커처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시내는 영하의 날씨에 난방도 전기도 끊긴 상태다. 파이프라인을 통해 러시아에서 받아오던 천연가스 공급이 22일 러시아 남부에서 발생한 갑작스러운 ‘가스관 폭발 사고’로 중단됐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집안에 있자니 너무 추워서 차라리 거리로 나왔다”며 푸틴 대통령에게 화살을 돌렸다.

‘가스푸틴’이라는 별명에는 푸틴 대통령이 천연가스를 무기로 삼아 전 세계를 쥐락펴락하려 한다는 비난의 뜻이 담겨 있다. 러시아제국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부부의 환심을 사 국정을 농단한 요사스러운 수도사 라스푸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러시아는 새해 들어 그루지야처럼 ‘탈(脫)러시아 친(親)서방’ 노선을 걷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몰도바에 대해서도 가스 공급을 일시적으로 중단한 적이 있다. “정치적 의도가 없다”는 러시아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푸틴 대통령의 ‘에너지 무기화 전략’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하지만 ‘에너지제국’ 러시아의 새로운 차르(황제)가 되겠다는 푸틴 대통령의 야망이 올해는 더 두드러지게 나타날 전망이다.

푸틴 대통령의 새해 첫 지방 방문지는 석유와 가스 등 에너지 자원의 보고(寶庫)로 불리는 시베리아의 사하(야쿠츠크) 공화국이었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정교의 성탄절(7일) 예배를 모스크바가 아닌 영하 45도의 야쿠츠크에서 봤다. 신에게 에너지대국 러시아에 대한 축복을 기도한 것일까. 아니면 러시아의 새해 화두가 에너지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까.

푸틴 대통령은 동시베리아에서 극동까지 이어지는 세계 최장의 송유관 공사 계획을 발표했다. 송유관이 완성되면 러시아는 유럽뿐 아니라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도 에너지 장악력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2000년 집권 후 ‘위대한 러시아 재건’을 외쳐 온 푸틴 대통령은 올해 선진 8개국(G8) 정상회의 의장을 맡았다. 러시아의 폭발적인 경제성장과 국제무대에서의 영향력 강화는 모두 석유와 가스 등 에너지 덕분이다.

푸틴 대통령의 ‘에너지를 앞세운 러시아 재건’ 구상은 하루아침에 나온 것이 아니다. 연방보안국(FSB) 국장 시절인 1998년 발표한 ‘러시아 경제발전 전략으로서의 천연자원’이라는 논문을 통해 체계화했다. 그동안 안팎의 우려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에너지 국가 독점을 강화해 에너지를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임기를 2년여 남긴 푸틴 대통령의 거취도 에너지 전략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이제 집권 연장과 퇴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물러나더라도 에너지 전략을 충실히 계승할 인물을 후계자로 삼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그래서 ‘포스트 푸틴’ 1순위로 꼽히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제1부총리가 에너지 국가 독점 체제의 핵심인 국영가스공사(가스프롬)의 이사장을 겸하고 있는 것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푸틴 대통령이 퇴임 후 가스프롬의 이사장을 맡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정치권력을 내놓아도 에너지산업만 장악하면 러시아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국가에너지전략의 향방은 우리에게도 먼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한국도 미래의 에너지원을 러시아의 시베리아와 사할린에서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올해부터 본격화될 크렘린 내부의 권력 변동에 눈을 뗄 수 없는 이유다.

김기현 모스크바특파원 kimkih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