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미래로 미래로]<10>영국 글래스고

  • 입력 2006년 2월 17일 03시 06분


《영국 스코틀랜드의 항구도시인 글래스고. 런던, 버밍엄에 이어 영국에서 세 번째 도시로 꼽히는 글래스고는 산업혁명기 스코틀랜드에 ‘부(富)’를 가져왔던 ‘대영제국의 공장’이었다. 그러나 글래스고에 망치 소리만 요란했던 것은 아니다. 애덤 스미스가 경제학과 윤리학을 가르친 글래스고대를 비롯해 글래스고는 ‘오래된 학원도시’로도 명성이 높았다. 산 혁명의 시대가 저물고 도시가 새롭게 살 길을 찾아야 했을 때 글래스고가 가진 ‘지식’이라는 무형의 자원은 도시를 새롭게 만들어 갈 핵심 요소로 떠올랐다.》

○산학단지를 도심에

도심 남쪽 7만6000여 평에 이르는 ‘퍼시픽 부두(Pacific Quay)’는 글래스고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조선소와 부두가 차지하고 있던 퍼시픽 부두는 이제 ‘디지털 미디어 캠퍼스’로 변모 중이다.

원래 개인 소유였던 이 땅은 주택지로 개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도시의 경제성장이 정체되고 주거단지가 만들어져도 수요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개발계획은 계속 지연됐다. 결국 스코틀랜드 개발청 글래스고 지부(SEGL·Scottish Enterprise Glasgow)가 땅을 사들였고 아예 용도를 바꾸어 ‘디지털 미디어 캠퍼스’로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왜 도심에 산학단지였을까. 1980년대까지만 해도 글래스고 시에는 기계 설계나 조선업, 전자제품 조립 등이 융성했다. 그러나 인구가 줄고 공장들이 점차 동유럽과 아시아로 옮겨감에 따라 ‘명성’은 급격히 쇠퇴했다. 새로운 성장산업이 필요했던 글래스고는 스코틀랜드의 경쟁력이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결국 ‘전화’나 ‘페니실린’의 원천기술을 세계 최초로 발명한 곳답게 미래 발전 역시 이 같은 정보기술(IT)과 생명공학기술(BT)의 범주 내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후 글래스고 시는 대도시이면서 공장 단지들이 상당 부분 공동화(空洞化)된 도심에 각종 대학과 연구개발센터를 모으기로 계획을 세웠다. 마침 전통의 글래스고대와 스트라스클라이드대는 정보통신 특화과정까지 갖추고 있었다.

2001년 과학센터가 건설되면서 ‘디지털 미디어 캠퍼스’ 조성에 속도가 붙었다. 아이맥스 영화관과 105m 높이의 글래스고 타워가 세워졌고 공원과 식당 레저시설 등이 속속 입주했다. 현재 BBC의 스코틀랜드 헤드쿼터가 이주 중이고, 인디 방송채널 S-TV와 채널 4도 입주할 예정이다. 새로 들어서는 방송사들은 시설비용이 많이 드는 스튜디오 등을 공유해 제작비를 절감할 수 있다.

SEGL의 임원 앨런 스티븐슨 씨는 “3개 종합대학과 10개 단과대학이 있는 글래스고의 인적자원을 이용한 산학 합작투자가 바로 글래스고 산업단지의 장점”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기술 개발을 위해 대학과 공동연구가 이뤄지고, 정보 공유와 자유경쟁이 활발한 것이 글래스고 첨단 미디어 산업단지의 경쟁력이다.

○여러 도시 계획을 하나의 프로젝트로 묶어

‘디지털 미디어 캠퍼스’ 같은 글래스고 재개발계획의 첫 단계는 자료의 집대성이었다. 1998년 글래스고 시의회는 각 지역구 의회가 입안 중이던 43개의 크고 작은 도시 관련 프로젝트를 상세히 검토했다. 각각 다양하게 준비되고 추진된 것들이었지만, 글래스고 시는 미래 20년을 내다보는 도시 건설을 위해 기존의 43개 지역계획을 통합하는 도시 전체의 계획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 처음으로 하나의 서류에 장기적 도시재개발 가이드라인을 만든 것이 바로 ‘더 시티 플랜(The City Plan)’ 이다. 이 지침은 4년마다 다시 검토돼 세부적인 개발의 원칙과 전략을 점검한다. 개발 시나리오를 발전시키고, 그것을 추진할 실행 주체와 주요 전략을 결정하는 절차를 거치도록 한 것이다.

꾸준하고 면밀한 계획과 자료의 집대성, 도시의 물리적 경제적 환경 모두를 포괄하는 정책, 행정과 의회, 민간부문을 망라하는 여러 추진 주체의 조율, 구체적이고 조직적인 운영전략과 분업화, 오래된 도시 기반시설과 대조되는 초현대식 디자인에 대한 수용…. 이것이 인구 61만 명에 1만1000개의 회사를 가지고 서비스산업이 도시 총생산의 79%를 차지하는 첨단산업도시로 글래스고가 스스로를 변신시켜 온 밑바탕이다.

스코틀랜드 건축 도시 디자인 센터의 프로그램 개발 사무국장 모라그 바인 씨는 “디자인은 우리의 환경을 탈바꿈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좋은 디자인은 일상의 것들을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보게 만든다”고 강조했다.

글래스고=정현아 DIA건축연구소 대표

▼형형색색 조명… 글래스고는 밤에 화장을 한다▼


글래스고 도심의 낮 풍경. 전통 유럽식 건물 사이사이에 화려한 원색이나 투명 유리로 가득 찬 첨단 디자인의 건축물이 조화롭게 배치돼 있다. 글래스고=조인직 기자

일찌감치 어둑어둑해지고 부슬비조차 그칠 줄 모르는 글래스고의 늦겨울 오후. 그렇지만 이 도시에 음산함이 아닌 로맨틱한 운치가 감도는 이유는 왜일까. 글래스고 시의 독특한 ‘조명(lightning) 프로젝트’ 때문이다. 시는 2002년 3월부터 별도의 ‘조명 전략팀’을 운용 중이다. 창조적인 디자인의 총천연색 경관 조명등을 도시 곳곳에 적절히 배치하고, 민간 건물이라도 주요 입지에 있는 것은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게끔 ‘조명 가이드라인’을 설정해 줘 도시를 수준 높은 예술품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크리스마스 때면 도심 곳곳에 세워지는 대형 트리 불빛부터 각 건물에 조그맣게 붙는 배너 광고 조명까지 조명 전략팀이 모두 관여한다.

시를 흐르는 클라이드 강변에 새로 세운 다리나 건물은 아예 설계 때부터 조명을 염두에 둔 것들로, 보라색이나 분홍색처럼 강한 색상을 사용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글래스고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된 과학센터 빌딩이나 BBC스코틀랜드 본사 건물도 밤이면 삼중 사중으로 겹친 컬러 조명들이 건물을 파고들 듯이 비춘다. 몇백 년의 역사가 깃든 옛 건물들도 조명계획이 시행되는 데 예외는 아니다.

시청 도시디자인팀에 따르면 앞으로 3년간 주요 번화가 가로수 조명등 정비사업에 104만 파운드(약 18억2000만 원)의 시 예산과 각종 민간펀드 수익금이 투입될 예정이다.

오후 4시만 돼도 헤드라이트를 켠 차가 눈에 띌 정도로 글래스고의 겨울은 낮이 짧다. 겨울철 시내 가로등은 오후 5시면 켜져서 이튿날 오전 9시가 돼야 꺼진다. 쇼핑몰이나 식당, 바들이 밀집해 있는 머천트 거리에서는 형형색색도 모자라 발광 강도가 큰 형광색 조명으로 시선을 붙든다. 가로등도 주홍빛이 아니고 연두색으로 빛난다. 전체적인 글래스고 시내의 조도는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에 조명등이 있는 곳은 마치 무대 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곳처럼 집중효과가 크다.

스코틀랜드 관광청(visitscotland.com) 마케팅 담당 컬스티 인 씨는 “글래스고가 대도시인 런던이나, 중세 성곽들로 가득 차 있는 전통도시 에든버러와 차별화되는 ‘모던 유럽’의 정체성을 쌓게 된 데는 ‘실험정신이 가득한 조명등’의 역할이 크다”고 말했다.

글래스고=조인직 기자 cij19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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