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비아는 핀란드 헬싱키 도심에서 동북쪽에 있는 해안가의 자기공장 이름.
20세기 중반까지 유럽 최대의 생산량을 자랑하던 이 공장이 생산을 멈춘 후 옛 공장 건물에는 ‘핀란드 디자인의 실험실’이라 불리는 헬싱키 미술대가 입주해 있다.
아라비아 공장 때문에 ‘아라비아의 해안’이라는 뜻의 아라비안란타라는 이름이 붙었던 이 지역은 지금 헬싱키에서 가장 야심적인 도시 실험이 벌어지는 곳이다.》
○ 사이버마을과 오프라인마을 함께
헬싱키는 아일랜드의 더블린과 함께 유럽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인구가 늘고 있는 도시다. 헬싱키 시청 도시계획과에 붙어 있는 시 지도에는 큼지막한 동그라미가 여기저기 표시돼 있다. 현재 도시 재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구는 7곳, 2010년까지 사업에 착수해야 할 곳은 6곳이다.
인구 증가는 필연적으로 주택 부족 문제를 부른다. 그러나 헬싱키 시의 목표는 충분한 주택을 공급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를 기회로 도시의 경쟁력을 키우는 질적인 실험을 병행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쇠락한 공장지역인 아라비안란타의 재개발. 목표는 2010년까지 1만2000명의 상주인구, 9000개의 일자리, 그리고 6000명의 학생들을 수용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시는 우선 경전철의 노선을 연장해 이 지역을 도심과 연결했다. 공장이 모여 있던 곳에는 정보통신 벤처기업들과 재즈음악원을 유치했다. 필요한 주거지는 바닷가 옛 항구 부근에 만들기 시작했다. 항구는 쇠락해도 바다는 변하지 않는 법. 항구에 휴양지를 방불케 하는 주거지가 조성됐다. “전철를 타고 10분이면 도심에 도착할 수 있는데도 아파트 창밖으로는 수평선이 보여요.” 아라비안란타의 주민 안나 알렌 씨의 자랑이다.
아라비안란타가 핀란드는 물론이고 유럽의 주목을 받는 이유는 단지 퇴락한 공장지대를 일급 주거지로 만들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라비안란타에서는 모든 도시 구성원들이 인터넷 공간의 도시정보에 무선통신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한다는 ‘헬싱키 가상마을계획(Helsinki Virtual Village)’이 진행되고 있다.
아라비안란타의 모든 사무실과 상점, 학교, 개인 집을 인터넷과 무선통신으로 연결해 가상마을(www.helsinkivirtualvillage.fi)을 만드는 작업은 지금 진행되고 있다. 이 홈페이지가 완성되면 아라비안란타 주민의 일상은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집을 얻으려면 부동산 중개인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상마을에 접속해 임대시장에 나온 아파트를 찾으면 된다. 쇼핑을 나갈 때는 미리 슈퍼마켓의 재고를 확인하고 집을 나선다. 휴대전화로 택시를 부르면 택시가 알아서 위치를 찾아온다. 현실의 도시와 무선 커뮤니티가 일체화한 세계 최초의 예가 되는 것이다.
○ 디자인과 정보통신 기술이 결합
아라비안란타의 ‘가상마을 계획’이 실현되기 이전에 헬싱키 시는 이미 여러 가지 시도를 해왔다. 그 한 예가 1999년까지 시 전체를 컴퓨터에 3차원으로 만들어 넣기로 했던 ‘헬싱키 애리너 2000’. 이 계획이 중지된 것은 빅 브러더의 출현을 염려하는 목소리 때문이 아니라 기술적인 것이었다.
국립대학인 헬싱키 미술대가 임차해 쓰고 있는 아라비아 공장 건물은 아직 민간기업 소유다. 그러나 그 주변의 땅은 모두 헬싱키 시 소유다. 헬싱키 면적의 70% 정도를 소유하고 있는 시 정부는 택지 개발을 하면서도 민간에 땅을 거의 팔지 않는다. 토지이용권만 장기계약으로 양도하고 임대료를 받는다. 한번 분양한 땅은 시가 다시 통제하기 어렵고 그만큼 미래를 대비한 장기계획을 세우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헬싱키 시는 토지이용권을 양도하더라도 최고 수준의 건물을 지을 것을 요구한다. 건축가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현상공모를 하든가, 자격을 지닌 건축가를 섭외해 시의 동의를 얻을 것을 계약조건으로 내거는 것이다. 이는 최고의 디자인을 얻기 위한 장치다.
아라비안란타의 실험은 결국 핀란드의 국가 경쟁력인 디자인 역량과 정보통신 기술력의 결합이다. 현대의 디자인은 컴퓨터가 없으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여기에 정보통신이 추가되면 날개를 달게 된다.
경쟁력의 결론은 자본과 관광객의 도시가 아니라 사람이 사는 도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헬싱키 미술대 도서관의 사서인 리타리사 레스키넨 씨는 자신이 지켜 보아온 아라비안란타의 변화를 이렇게 말했다.
“점점 사람이 많아지고 활기가 넘쳐서 좋습니다. 이렇게 한국에서도 찾아 올 정도가 되었으니까요.”
헬싱키=서현 교수 한양대 건축학부
■도시와 자연 사이에 금긋지 마세요…환경도시모델 ‘비키’
아라비안란타보다 더 동북쪽에 있는 비키. 벌판에 헬싱키 생명과학대 하나가 덩그러니 들어서 있었던 이곳은 이제 도시와 자연의 공존, 다양한 계층의 더불어 살기라는 실험이 성공적으로 진행된 재개발 지구로 평가받는다.
헬싱키 시는 비키를 개발하며 일부를 시범사업지구로 지정했다. 에너지 관리, 오폐수 관리 등에서 현행 법규보다 훨씬 강력한 기준을 세웠고 입주 이후에는 사후 평가서도 제출하도록 개발사업자들에게 요구했다.
분양가구보다 임대가구의 수가 더 많도록 비율도 규제했다. 개발사업자는 분양가구 비율을 높이려 하지만 저소득층은 임대가구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감안한 것이었다.
이런 기준에 따라 도시를 개발한 업자들은 도시와 자연 사이에 금을 긋지 않았다. 건물이 들어서지 않는 곳은 나무, 돌을 원래대로 거의 살려두었다. 이런 공간은 이제 어린이들이 뛰어놀고 주민들이 대화를 나누는 마당이 되었다.
입주 이후 비키 지역은 헬싱키에서 가장 좋은 주거 단지로 소문이 났다. 소득 수준과 관계없이 입주자들의 학력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입주민의 80% 정도는 비키의 자연친화적인 환경이 입주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고려 요소였다고 답했다.
시범단지에서 환경친화적 건물을 만드는 데 추가되는 비용은 공사비의 5% 정도였다. 추가공사비는 어렵지 않게 회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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