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이 총재는 일본 경제가 침체에서 벗어난 만큼 5년간 줄곧 느슨하게 풀어놓았던 돈줄을 앞으론 조이겠다는 뜻을 강하게 내비쳤다. 그러자 고이즈미 총리는 특유의 애매한 화법으로 “(돈줄을 조였다가) 실패해서 원래대로 되돌아가는 일이 있어선 안 되니 현명하게 판단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경기가 꺾이면 일본은행의 책임이니 신중하게 결정하라는 은근한 압력이었다.
그러나 일본은행은 9일 열린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비정상적인 돈줄 풀기 정책(양적 완화 정책)을 더는 사용하지 않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정부보다는 시장의 신뢰를 얻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한편 발표 직후 태국 밧화 등 아시아 통화들은 일제히 약세를 보였다. 투자자들이 엔화 환율 변동 가능성에 대한 위험 분산을 위해 달러화 매입에 나섰기 때문이다.
▽무언으로 화답한 시장=일본은행은 이번 조치를 1년여 전부터 암시해 왔고 금융기관과 기업은 이에 충분히 대비해 왔다. 발표 직후 금융시장이 이상할 정도로 무덤덤한 반응을 보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일본경제는 이제 정상’이라는 일본은행의 선언에 시장이 무언으로 동의해 준 셈. 만일 일본은행이 기존의 정책을 계속 고수하겠다고 했다면 시장이 요동했을 가능성이 컸다.
물론 금융시장이 차분하게 반응한 좀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간 중환자나 다름없었던 일본경제의 체력을 살펴 가며 천천히 돈줄을 조이겠다고 일본은행이 약속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조치가 중장기적으로 일본, 더 나아가 세계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일본은 1998년 ‘전후 최대 불황’을 맞은 뒤 1999년 2월부터 사실상 금리를 0%에 가까운 수준으로 유지해 왔으나 이번 조치로 ‘제로금리 시대’의 폐막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빚더미 재정이 시한폭탄=그동안 이자율이 낮아 가장 괴로웠던 쪽은 금리생활자, 가장 즐거웠던 쪽은 낮은 이자로 빚을 내 흥청망청 써 온 정부였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처지가 바뀐다.
9일 현재 일본정부의 채무는 771조8830억 엔(약 6408조 원). 더구나 1분에 6448만 엔(약 5억3531억 원)이 늘어나고 있다. 단순 계산으로 이자율이 1%포인트만 올라도 연간 이자 부담은 64조 원이나 늘어난다.
이자 부담은 둘째 치고 빚내서 빚 막기도 여의치 않게 된다. 일본은행이 한시적으로 매달 1조2000억 엔어치의 국채를 사 주기로 했지만 당장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하든지 세금을 올리든지 해야 할 처지다.
은행이나 기업 부문은 정부에 비하면 별로 걱정이 없는 편이다.
2002년까지만 해도 은행과 대기업의 무더기 도산으로 부실채권이 천문학적으로 늘었지만 금융재생 계획을 통해 말끔히 털어 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경제의 장래는 나랏빚을 어떻게 줄여 나가느냐에 달려 있다는 분석이 많다.
▽한국에 미칠 영향은=이자율이 비정상적으로 낮은 일본의 자금은 세계 여기저기로 흘러갔다. 규모는 베일에 가려 있지만 한국의 은행이나 기업도 비싼 ‘달러 빚’ 대신 값싼 ‘엔화 빚’을 적지 않게 빌려다 썼다는 게 금융권의 분석이다.
하지만 일본 금리가 오르면 이 자금 가운데 일부가 일본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행 도쿄사무소 장광수(張廣洙) 차장은 “환율이 금리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조치는 장기적으로 보면 엔화 가치를 오르게 하는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도쿄=천광암 특파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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