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미래로 미래로]<17>콜롬비아 보고타

  • 입력 2006년 3월 14일 03시 04분


버스가 기반이 되는 보고타 시의 급행교통체계 ‘트란스밀레니오’의 정류장. 현재 총연장 41km인 중앙버스전용차로는 2016년까지 388km로 늘어나게 된다. 사진 제공 보고타 시
버스가 기반이 되는 보고타 시의 급행교통체계 ‘트란스밀레니오’의 정류장. 현재 총연장 41km인 중앙버스전용차로는 2016년까지 388km로 늘어나게 된다. 사진 제공 보고타 시
콜롬비아의 보고타. 마약과 정치적 혼란, 그리고 폭력의 악순환으로 기억되는 이 도시가 제대로 된 공공정책을 만나면서 세계가 주목하는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공해가 줄어들고 녹지 공간이 늘어났다. 무엇보다 시민들에게 ‘이 도시의 구성원’이라는 자긍심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희망의 도시로 향하는 바른 길을 찾아낸 것이다.

○버스와 자전거가 주축을 이루는 트란스밀레니오

보고타는 제3세계의 다른 도시들처럼 질곡의 근대사를 거치며 성장해 왔다. 18세기 스페인의 식민통치를 받던 시절 건설된 보고타는 지난 100년간 농촌 붕괴에 따른 농촌 인구의 급격한 유입을 겪었다. 정치적 혼란도 인구 증가에 한몫했다. 1948년 이래 보수당과 자유당 양당이 벌인 준 내전 상태를 피해 사람들은 꾸역꾸역 도시로 몰려들었다. 그 사이 보고타의 인구는 12만 명에서 50배가 넘는 700만 명으로 늘었다.

보고타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몬세라테의 언덕에 서서 멀리 바라보면 그저 뿌연 갈색의 도시가 지평선 끝까지 아물거릴 뿐이다. 계획적으로 건설된 도시가 아니어서 교통체계, 상하수도 시설, 공원 등의 인프라는 열악했다. 극심한 빈부 차는 도시 안에 수많은 배타적인 경계를 만들어 냈다. 이런 혼돈 속에 1998년 엔리케 페날로사(54) 시장이 등장했다.

보고타 시민들은 그를 ‘트란스밀레니오(Transmilenio)’라는 이름의 공공교통정책과 묶어 기억하려 한다. 그가 강력히 추진한 ‘트란스밀레니오’는 BRT(Bus-based Rapid Transit), 즉 버스가 기반이 되는 급행교통체계와 301km에 이르는 자전거 전용도로체계를 주축으로 한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을 지원하는 또 다른 제도는 강력한 자가용 5부제 운행제도인 ‘피코 이 플라카(pico y placa)’와 ‘시클로비아(ciclovia)’다. ‘피코 이 플라카’에 따라 자가용을 모는 보고타 시민들은 닷새에 한번 꼴로 차를 두고 러시아워인 오전 7∼9시, 오후 5∼7시에 버스로 출퇴근한다. ‘시클로비아’는 1주일에 한번 차도에 자전거만 다니게 하는 제도다.

간선과 지선으로 잘 짜인 버스 시스템은 하루 75만 명을 실어 나른다. 2016년까지 4단계 사업이 끝나면 현재 총연장 41km인 중앙버스전용차로는 388km로 늘어난다.

시민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돌아오는 승용차 운행제한을 잘도 참고 지킨다. 자전거 전용도로는 녹지로 보호되며 오고 가는 방향에 따라 중앙선까지 그어져 있다. 차 없는 일요일이면 15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거리로 나온다. 시는 공원을 늘리고 이것들을 잘 다듬어진 보행자 몰로 연결한다. 2005년 보고타의 범죄율은 미국의 워싱턴이나 볼티모어보다 낮았다.

○문명화된 도시의 조건

이런 도시정책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근본철학을 페날로사 전 시장은 ‘환경친화’라는 말이 아닌 다른 것으로 설명한다. 그는 문명화된 도시의 기초 조건은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도시 어디든 갈 수 있으며 집 바깥 어디서든 마음 놓고 뛰어놀 수 있고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부드러운 말 뒤에는 더 나은 민주사회를 향한 강고한 철학이 있다. 사람들이 자기 차에서 내려 이웃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일터로 향하는 것은 그에겐 교통 정책이 아니라 사회 통합의 일환이다. 공원과 보행자 몰에서 서로 어울리며 사람들은 시민으로서의 연대감을 갖게 되고 이것이야말로 콜롬비아 사회에 횡행하는 극단적인 폭력을 감소시킬 것이라는 기대가 정책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다.

어떻게 3년 단임의 짧은 기간에 페날로사 전 시장은 많은 도시 공공정책들을 실천할 수 있었을까? 해답은 이미 수많은 시민단체가 준비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중 하나인 ‘시우다드 우마나(Ciudad Humana·인본도시)재단’의 아말리아 로드리게스(24) 씨는 말한다. “우리는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을 동원해 인간적 도시를 위한 정책들을 연구해서 시 당국에 제안하고 지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자전거 도로인 시클로비아에 집중하지만 다른 단체들은 또 그들 나름의 공공영역 만들기 과제에 집중하고 있죠.”

인간 중심의 정책과 시민들의 호응 그리고 시민단체의 적극적 개입이 보고타의 물리적 풍경과 마음의 풍경을 바꾸어가고 있다. 그 변화는 보고타를 닮은 제3세계의 도시들에 새로운 희망의 단서를 던져주고 있다.

보고타=이종호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

▼“일요일인데 車들이 다 어디갔지?”▼

120km에 이르는 자동차 도로에 차가 달리지 않는 날인 ‘시클로비아’의 보고타 도심 풍경이다. 시클로비아가 실시되는 일요일 오전 7시부터 오후 2시까지 보고타 시민들은 자전거를 타거나 달리기를 하며 도시의 자유를 만끽한다. 사진 제공 시우다드 우마나 재단

보고타 시에 사는 한국인 교포 데이비드(한국명 동진·11세) 군은 촉망받는 축구선수다. 일요일이면 축구클럽에 나가 연습을 한다. 하지만 가끔은 자전거를 몰고 차도 위를 달린다. 강아지와 엄마까지 아스팔트 위로 나선다. 데이비드 군은 보고타 북쪽의 아파트에 살지만 이날만큼은 마음만 먹으면 자전거를 타고 멀리 도심까지도 내달린다. 바로 자동차 도로를 자전거를 타고 달릴 수 있는 ‘시클로비아’의 날이기 때문이다.

차 없는 거리라면 다른 여타 도시에도 있는 행사다. 짧은 거리에서 반짝 생색내기일 경우도 많다. 그러나 보고타에서는 그 의미가 다르다. ‘시클로비아’가 실시되는 매주 일요일 일곱 시간 동안 보고타 시에는 총연장 120km에 이르는 차 없는 거리가 만들어진다. 이는 기왕에 마련된 자전거 전용도로와는 별도의 구간이다.

자동차가 멈춘 길에는 시민들이 나와 자전거와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거나 조깅을 즐긴다. 산책을 하는 나이든 시민도 있다. 대도시 보고타의 자동차 도로가 시민들의 앞마당이 되는 것이다

최근 설문에 따르면 83%의 보고타 시민이 이 행사에 찬성하고 행사구간이 더 늘어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시 당국과 자원봉사에 나선 시민단체는 안전하게 교통을 통제할 뿐 아니라 도로 중간에 자전거나 인라인스케이트가 걸릴 만큼 파인 곳은 없는지, 행사가 벌어지는 도로들 간의 연결은 원활한지를 계속 살피고 개선해 나간다.

이 행사는 여러 가지 정치적 효과를 만들어 내는 ‘즐거운 계몽’이다.

시민들은 ‘시클로비아’를 통해 자동차만이 유일한 현대적 교통수단은 아니라는 체험을 하게 된다. 차 없는 거리를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 모든 계층과 인종을 넘어서는 어울림이 만들어지고 연대감이 싹튼다. ‘시클로비아’는 불평등하기 쉬운 도시사회를 더 나은 민주사회로 만들어 가는 또 다른 의미의 길(via)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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