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YT기자-美예비역 중장 “美 바그다드 조기함락은 실패작”

  • 입력 2006년 3월 14일 03시 04분


2003년 3월 이라크전쟁 개시 직후 미군 수뇌부와 야전지휘부 사이의 심한 갈등으로 인해 수뇌부가 야전사령관을 해임하겠다고 위협까지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 미군 수뇌부의 의견이 최종 채택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이라크의 혼란상이 초래됐다는 분석도 나왔다.

이라크전쟁을 취재한 뉴욕타임스의 마이클 고든 기자와 버나드 트레이너 예비역 해병 중장은 이달 중 런던 등지에서 출판될 공저 ‘코브라Ⅱ(부제 이라크 침공 및 점령 비사)’에서 이 같은 전쟁 관련 비화와 함께 이라크전쟁을 다각도로 분석했다.

▽신속 진격 논란=이라크전쟁 발발 일주일 만에 토미 프랭크스 미 중부군 사령관(대장)은 불같이 화를 냈다. 미 제5군단 사령관 윌리엄 월리스 중장이 바그다드 진격을 머뭇거렸기 때문이다. 월리스 사령관은 기자들에게 “바그다드 진격 대신 후방의 페다인 민병대를 먼저 물리쳐야 한다”는 사견을 피력했다. 페다인 민병대는 사담 후세인 대통령 시절인 1990년대 중반 시아파를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대였다.

미 제1해병 원정군을 이끌던 제임스 콘웨이 사령관(중장)도 페다인 민병대의 집요한 공격을 우려했다. 데이비드 매키넌 제1기갑사단 사령관(중장)도 미군의 주적은 공화국 수비대와 페다인 민병대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월리스 사령관의 발언을 신문 보도로 접한 프랭크스 사령관은 비슷한 태도를 보이고 있던 매키넌 사령관에게 전화해 “월리스를 해임하겠다”고 위협했다. 프랭크스 사령관은 또 3월 31일 매키넌 사령관을 찾아가 “적극 공격에 나서라”고 질책했다. 신속 진격론자였던 프랭크스 사령관은 일선 지휘관들의 바그다드 진격 유보 움직임을 항명처럼 보았다. 결국 미군은 진격에 나서 4월 9일 바그다드를 함락시켰다. 3월 20일 개전 이후 3주일 만의 전과였다.

▽신속 진격의 후유증=프랭크스 사령관은 바그다드 함락 후 제1기갑사단 1만6000명을 추가 배치하려던 계획을 취소했다. 이 결정을 내린 책임자는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제1기갑사단 추가 배치 취소는 미군 수뇌부의 결정적 패착이었다고 ‘코브라Ⅱ’ 저자들은 지적했다. 추가 병력 투입으로 일망타진될 뻔했던 페다인 민병대는 시간을 벌어 수니 삼각지대 일대로 흩어져 현재까지도 저항활동을 벌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프랭크스 사령관은 국방부가 선호하는 아마드 찰라비 이라크 국민회의 의장과 지지자들을 군 수송기에 태워 이라크 남부로 들여보냈다. 이라크인들이 직접 반 후세인 투쟁에 나섰다고 선전하기 위한 독단적인 조치였다.

그렇지만 국무부와 중앙정보국(CIA),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는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찰라비 의장은 미국이 밀어 주는 것처럼 하며 세력을 넓힌 끝에 현재 부총리에 올라 있다. 이는 미국이 이라크 정치를 좌우한다는 인상을 국제사회에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결국 미국에는 마이너스 요인이 됐다.

이 진 기자 lee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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