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주 칼럼]한일 관계, 미국의 역할을 기대한다

  • 입력 2006년 4월 27일 03시 03분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닫는 것 같던 한일 관계가 외교적 방법으로 일단 수습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문제를 침착하고 전문성 있게 관리해 준 한일 양국 외교 당국자들의 역할이 돋보였다. 북한 핵 문제, 동아시아공동체 구성, 한일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등 긴밀히 협력하고 협의해야 할 중요 사안이 산적해 있는데도, 한일 두 나라가 타협할 수 없는 영토 문제로 불화에 휩싸이고 정력을 소모하는 것은 두 나라 모두에 백해무익한 일이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이 갈등을 일으키며 알력 관계를 보이는 것은 양국과 동맹 관계인 미국으로서도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이미 그동안 한일 간의 불화는 6자회담과 관련해 한미일 3국 간의 협조와 협력에 큰 지장을 주어 왔다. 미국으로서는 군사적으로도 한일 간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한반도의 유사시에 대응하려면 일본의 협조가 불가결하다. 동시에 일본의 안보에 한반도와 한국이 중요한 비중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1960대의 미소 양극화 시대, 미국은 한국과 일본이 국교를 정상화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일도 있다. 당시 미국은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후 아직 수교하지 못한 현실을 개탄하여 두 나라의 화해를 적극 주선한 바 있다. 물론 그때와 지금은 국제적 환경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 당시 미국은 소련의 팽창과 위협에 대응해야 한다는 절대적 필요가 있었고, 일본과 한국은 안보와 경제 부문에서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지금은 미국이 동북아에서 소련이 아닌 중국을 견제할 필요를 느낄 수도 있으나, 그것을 양극화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더구나 한국은 대중국 견제 전선의 일원이 되는 것을 사양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미국은 한일 간 화해와 협력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그 다리를 놓아 줄 수 있는 유일한 위치에 있다고 하겠다. 일본은 미국과의 동맹 관계 강화를 외교의 기조로 삼아 왔고, 특히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지난 5년 집권 동안 미일 관계는 지극히 밀접한 사이가 되어 왔다. 미국이 일본에 한일 관계를 개선하라는 충고를 한다면 일본은 그것에 귀를 기울일 입장인 것이다.

지금까지 고이즈미 총리의 일본 정부는 오히려 미국과의 가까운 관계를 믿고 한국 등 주변국을 소홀히 하는 오만한 태도를 보여 왔다.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고, 독도의 영유권 문제를 격화하는 행동을 취했다. 동시에 미국은 한일 간의 분규에 제3국으로서 어느 쪽을 두둔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는 판단으로 개입이나 입장 표시를 삼가 왔다. 결과적으로 한일 수교 이후 두 나라 관계에 미국의 불개입 정책은 의도하지 않은 가운데 한일 관계 악화에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한국과 일본 두 나라는 물론 미국 자신의 이익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미국은 일본에 주변국, 특히 한국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도록 강력하게 조언해야 한다. 총리가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것이 왜 일본 자신의 이익에 역행하는 일인지를 일깨워야 한다. 한국과의 영토 분쟁을 격화하는 것이 왜 미일 동맹에 불리한 일인지를 알려 주어야 한다. 과거사를 아직도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왜 동북아 여러 나라와의 불화 원인이 되며, 그것이 왜 일본과 미국에 손해가 되는 일인지를 일본에 설명해 주어야 한다.

일본은 다른 나라의 말은 듣지 않더라도 미국의 우호적인 고언은 경청할 것이다. 만약에 고이즈미 총리가 이러한 충언에 설득될 가능성이 없다면 미국은 9월 들어설 것으로 예상되는 새 총리와 정부에 강력한 설득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다행히 이번 사태에선 미국이 한일 갈등에 대한 불개입 정책을 지양하고 건설적인 역할을 한 흔적이 보인다. 앞으로 미국이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할 것을 기대한다. 다만 그것은 조용하고 드러나지 않는 외교를 전제로 한다.

한승주 고려대 명예교수·전 외무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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