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김승련]美 어느 공직자의 용기있는 투쟁

  • 입력 2006년 4월 27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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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없는 아우성, 찬란한 슬픔, 작은 거인…. 언젠가 국어교과서에서 배웠던 모순화법의 사례들이다. 그렇다면 ‘용감한 공직자’는 어떨까?

‘모순화법’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미국에서도 공직자의 용기는 희귀한 사례로 꼽히는 것 같다. 몇 달 전 뉴욕타임스에서 ‘이 시대, 사라져 가는 용기와 봉사정신을 겸비한 인물을 찾는다’는 광고 문구를 봤다. 존 F 케네디 기념관이 용기 있는 행동을 한 정치인·공직자에게 주는 ‘용기 있는 삶(Profiles in Courage)’ 수상자를 공모하는 광고였다.

이 상은 케네디 대통령이 초선 상원의원 시절인 1956년 쓴 책의 제목에서 따 왔다. 손해 볼 것이 뻔하지만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했던 상원의원 8명의 외로운 결단을 그려낸 이 책은 이듬해 퓰리처상까지 받았다.

3월 초 발표된 이 상의 수상자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인물은 앨버토 모라라는 전직 해군 법무감이었다.

4성 장군 대우를 받은 그는 2002년부터 미군의 테러범 포로 신문 기법이 고문에 가깝고, 미국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라며 치열한 내부투쟁을 벌였다. 이라크 감옥의 학대, 관타나모 포로수용소 가혹행위가 불거지기 2, 3년 전의 일이다. 그는 지난해 말 해군을 떠났다.

그가 수상자가 된 것은 내부 고발 때문만은 아니다. 조직에서 일해 본 사람이라면 내부 고발자가 된다는 게 얼마나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인지 잘 안다.

그가 남달랐던 것은 문제를 바로잡으려는 방식에 있었다. 그는 폭로 기자회견, 언론에 흘리기, 입맛에 맞는 정치인에게 정보 넘기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미국인 보호를 위해 강압조사가 불가피하다는 강경파나, 상부의 지시라며 좋은 게 좋다는 일부 동료나, 문제점은 인식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던 이들과 다른 길을 갔다. 상급자에게 따졌고,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동료를 모았다. 때로는 다른 관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고, 속았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외부 공개는 삼갔지만, 익명의 그늘에 숨지도 않았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테러범 신문 수칙은 ‘고문과 강도 높은 수사의 경계를 절묘하게 넘나든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간과해선 안 될 상황논리가 있다. 2002년은 미국인 3000명이 사망한 9·11테러 직후였고, ‘제2의 테러가 임박했다’는 진술이 나왔고, ‘우리가 정보를 파악해 막지 못하면 수천, 수만 명이 또 죽는다’는 다급함과 사명감이 정권 핵심부를 짓누르던 시점이었다.

그는 뼛속 깊숙이 보수 철학을 간직한 공화당원이었다. 이라크전쟁을 지지했고,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는 미국식 민주주의가 지닌 가치를 무엇보다 앞세웠다. 천부(天賦) 인권은 제2의 테러 가능성이나, 테러범은 제네바 협정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가 뛰어넘을 수 없는 최고의 가치라고 믿었다. 그는 이런 신념을 22쪽에 걸친 일지 형식의 메모에 담아 냈고, 입소문을 통해 메모의 존재가 결국 드러났다.

올해 들어 한국에선 크고 작은 폭로, 유출, 고발이 이어졌다. 올해 초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합의를 앞두고 한미 간 회의록이 청와대 참모의 손을 통해 유출되는 일이 빚어졌다. 전직 대통령비서관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판 등 내부 고발성 발언도 나왔다.

어떻게 판단할지는 독자의 몫이다. 그러나 모라 전 법무감의 용기는 한국의 공복(公僕)에게도 묵직한 가르침을 던진다. 용기 있는 공직자라는 표현이 결코 모순화법이 아니라는 것을 그의 행적은 ‘소리 없는 웅변’으로 보여 주고 있다.

김승련 워싱턴 특파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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