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슬부슬 내리는 비로 쌀쌀한 기운이 감돌던 10일.
웰즐리 동문인 제인 아라프 전 CNN 이라크 지국장의 강연이 진행된 펜들턴 빌딩에 학생 150여 명이 모였다. 전쟁과 테러의 위협 속에서도 뉴스룸을 굳건히 지킨 아라프 전 지국장이야말로 가장 웰즐리다운 모습이다. 봄 학기 마지막 날인 이날 졸업을 앞둔 4학년생들이 자신들의 상징색인 보라색으로 학교를 장식해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풍경을 연출했다.》
이날 강연회는 웰즐리 학생회 단체인 정치 및 입법회(회장 소피 김·정치학 4년·22)가 주관한 행사. 남녀공학에서라면 흔히 남학생 중심으로 구성됐을 학생회이지만 이곳 웰즐리에서는 다르다. 이런 행사를 하나 치르는 것만 해도 여학생들이 스스로 계획하고 추진함으로써 지도자 훈련을 거치는 셈이다.
여학생들이 스스로 행사를 꾸리고 대외활동에 참여하는 모습은 웰즐리를 배경으로 한 영화 ‘모나리자 스마일’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결혼을 인생의 목표로 생각했던 상당수 여성의 모습을 그려 낸 영화가 모나리자 스마일인데, 현재의 웰즐리는 자신의 성취를 꿈꾸는 여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웰즐리에서는 모든 것이 학생들을 여성 지도자로 만드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160여 개의 각종 학생회 조직과 클럽 활동을 비롯해 인턴 프로그램도 지도자 경험을 미리 해 보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이런 웰즐리 학생들의 대외활동의 중심축에 웰즐리 동문회가 자리 잡고 있다.
‘웰즐리 커넥션’이라고 불리는 동문과의 긴밀한 유대는 130년간 여자대학의 전통을 유지해 온 웰즐리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 학생들이 경험하는 지도자 훈련의 하나는 ‘워싱턴 프로그램’이라고 불리는 인턴 프로그램.
제시카 리(정치학과 4년·22) 씨도 지난 겨울방학에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을 비롯해 수많은 여성 지도자의 활동을 가까이서 지켜본 그는 “고위직에서 활동하는 여성 실력자들을 만나 이들의 움직임을 살펴본 것은 소중한 경험이었다”며 “동문 네트워크가 학생들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현재 생존한 웰즐리 동문은 약 3만5900명.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과 미국 최초의 여성 국무장관인 매들린 올브라이트 조지타운대 교수, 이인호(李仁浩) 전 주러시아 대사가 이 학교를 나왔다.
웰즐리 동문회에는 100개에 이르는 웰즐리 후원 클럽이 있고, 전 세계 40여 곳에 동문 연락을 담당하는 연락책이 있다. 웰즐리 출신의 적극적인 후배 사랑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현재 2만여 명의 동문이 후배를 돕겠다는 신청서를 웰즐리 직업 및 서비스센터에 제출해 놓고 기다리고 있다.
웰즐리 동문의 소개로 겨울방학에 세계은행을 방문했던 엘레노어 블럼(사회학·22) 씨는 “재정적인 지원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웰즐리라는 이름을 통해 파워가 있는 여성들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뿐만 아니다. 웰즐리대가 최고의 교육환경을 유지하겠다는 목표로 2000년부터 2005년까지 벌인 기금 마련 캠페인에서 동문들이 보여 준 적극적인 참여는 대다수 남녀공학 학교를 머쓱하게 했다. 4억 달러를 목표로 시작된 캠페인이 종료된 2005년 6월에 모인 기금은 목표치를 훌쩍 뛰어넘은 4억7230만 달러. 동문들의 기여는 71%였다.
웰즐리대 입구에 새로 지어진 왕 센터도 2000년 룰루 차우 왕(1966년 졸업) 씨가 2500만 달러를 출연해 지은 것이다. 왕 센터는 학생들의 휴게실, 서점, 식당, 체육시설 및 전시실로 이용되고 있다.
이런 동문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두고 다이애나 채프먼 월시 총장은 “학생 1명당 10명의 후원자가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곤 한다.
물론 웰즐리대도 1970년대 초반에는 남녀공학 바람에 잠시 흔들리기도 했다. 한때 400개에 이르던 미국 내 여대는 1960년대 233개로 줄었고, 1992년에는 84개로 줄었다. 최근엔 70여 개에 불과하다.
웰즐리대도 1969년 학교의 미래를 논의하는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2년간의 논의 끝에 상대적으로 기회가 적은 여성에게 최고 수준의 교육을 제공한다는 설립 원칙을 재확인하며 여대로 남기로 했다.
역대 웰즐리대의 총장은 물론 여성의 몫이었다. 1972년 필립 피브스 씨가 남성으로 유일하게 두 달 남짓 총장 권한대행을 맡았다. 그러나 그가 총장대행으로 있던 시기에 캠퍼스 내 갈렌 스톤 탑에 벼락이 치자 그는 물론이고 대학 관계자들은 이를 ‘남자는 안 된다’는 ‘계시’로 받아들였다고 한다(웰즐리 125년사·2000년).
그 후 웰즐리대는 최고 수준의 여성 교육이라는 목표에서 흔들리지 않았다.
과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웰즐리는 19세기에 매사추세츠공과대(MIT)에 이어 미국에서 두 번째로 물리학 실험실을 만들었다. 이런 기초과학의 토대 위에 최근에는 생명공학 및 신경공학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웰즐리대는 유에스뉴스앤드월드리포트가 발표하는 인문학 대학 순위에서 윌리엄스대와 애머스트대 등에 이어 꾸준히 4위를 차지하고 있다. 2006년에는 학생들이 필요로 하는 재정적 지원 및 학업의 수준을 측정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 대학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앤드루 셰넌(역사학) 교수는 “웰즐리대의 강점은 재능 있는 여학생들이 뛰어난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길러 준다는 것”이라며 “지도력은 성(性)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다”고 말했다. 캠퍼스에서 만난 여학생들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웰즐리=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남편이 대통령이라고 연단 설 수 있나” 문제제기
바버라 부시 졸업식 연설 못할뻔▼
1990년 6월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 부인인 바버라 부시 여사가 웰즐리대 졸업식에 연설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웰즐리대 일부에서 연사로 초청된 부시 여사의 자격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
학생 일부가 “자력으로 뭔가를 이뤄낸 여성이 연사가 돼야지 남편이 대통령이라고 연사로 초청하면 되느냐”고 주장한 것이 문제의 발단. 배우자의 자질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자질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웰즐리대의 가르침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주장에서였다.
언론들이 이 문제를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둘러싼 논란과 연계시켜 집중 보도하자 이 문제는 사회적 쟁점으로까지 부상했다.
1990년대의 잣대로 과거를 살아온 사람을 재단하려 한다는 지적, 가족의 울타리를 지켜 온 여성의 역할을 인정해야 한다는 반론이 이어졌지만 결국 초청연사 선정은 졸업생 대부분의 의사를 반영한 민주적인 절차였다며 마무리되었다.
이를 염두에 둔 듯 부시 여사는 졸업식 연설에서 “연설을 듣는 사람들 가운데 나의 길을 따라 대통령의 배우자로서 백악관에 들어갈 사람이 있을지 누가 알겠느냐”고 말했다.
부시 여사는 이날 여성대통령 시대에 대한 기대를 간접적으로 시사함으로써 웰즐리대 졸업생들의 ‘콧대’를 세워주었다.
웰즐리대 학생회장 출신인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이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결혼한 후에도 로댐이라는 자신의 성을 사용하고 독립적으로 활동한 것도 웰즐리대의 정신과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웰즐리=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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