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물론 연방정부의 고위 관리도 만나지 않았다. 방문지도 캘리포니아 워싱턴 유타 등 서부지역 3개 주(州)로 국한했다. 눈에 띄는 일정이라곤 캘리포니아 주 의회에서 연설한 것 정도였다. 수도 워싱턴과 ‘거리’를 두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공식 기자회견이나 인터뷰도 생략했다. 미국 신문들은 폭스 대통령이 유타 주에서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질문을 받는 사진을 실었다. 국내 정치인이라면 모를까, 미국을 방문한 외국 정상의 모습이라고는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미국과 국경을 맞댄 우방국가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자 경제 규모 10∼13위를 오르내리는 국가의 정상이 왜 이렇게 ‘초라한 일정’으로 방문한 것일까. 부시 대통령과 폭스 대통령의 ‘정상 간 우호’를 생각하면 미국의 푸대접 때문은 아닌 것 같다.
멕시코 정부는 폭스 대통령의 이번 방문을 투자 확대를 위한 경제외교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진짜 의도는 미국 상원의 이민법 표결(25일)에 맞춰 멕시코의 사정을 호소하기 위한 것임이 분명했다. 1200만 명으로 추산되는 미국 내 전체 불법이민자 가운데 멕시코 출신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폭스 대통령은 캘리포니아 주에서 이민법 처리 문제를 정식 거론했다. 그는 “책임을 통감한다. 멕시코도 최선을 다하겠다. 미국도 강경하게 대처하지는 말아 달라. 멕시코 노동자가 미국 경제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그의 ‘파격적 방문 일정’을 바라보는 미국 조야(朝野)의 시선은 싸늘하다. “국가적 쟁점 법안의 처리 시점에 맞춰 남의 나라를 방문해 자국에 유리한 법안 통과를 위해 ‘로비’를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비난까지 나왔다.
폭스 대통령도 이런 일정이 내켰을 리 없다. 하지만 그는 ‘초라한 외교’라도 마다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그는 6년 임기를 마치고 올해 말 퇴임한다. 6년간 나라를 경영했지만 해마다 수백만 명의 멕시코인이 일자리를 찾아 조국을 떠나는 현실은 계속되고 있다.
국민에게 일자리를 주지 못한 정치 지도자의 처지는 더없이 초라했다. 그래도 폭스 대통령은 ‘남의 탓’은 하지 않았다.
김승련 워싱턴 특파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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