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처럼 구릿빛이었으면 하는데…. 햇볕에 내 살갗을 그을리고 있잖니.”
영국의 백인 아버지 A(35) 씨와 황색인 아들(6)이 최근 해변에서 나눈 대화 한 토막이다. 영국 대중지 선은 지난달 30일 백인 부부가 시험관 수정(受精) 착오로 아시아계 쌍둥이 남매를 두게 된 사연을 소개했다. 신문은 영국 법률에 따라 이 가족의 신상 정보를 밝히지는 않았다.
▽희망=동갑내기인 A 씨 부부는 학창시절부터 사귀다 21세 때 결혼에 골인했다. 아이를 가지려고 애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검사를 해 보니 남편의 정자 수가 적었다. 부부는 시험관 수정을 통해 아이를 갖기로 했다.
이들은 18개월을 대기한 끝에 1999년 영국 리즈에 있는 국립의료원(NHS) 산하 병원을 찾았다. 30쌍의 부부가 북적거려 어수선했지만 남편은 정자를, 아내는 난자를 각각 채취했다. 남편은 자신의 정자가 담긴 병에 이름 등을 써서 넘겼다.
아내의 간절한 기도가 응답을 받은 듯 임신에 성공했다. 그것도 쌍둥이였다. 33주 뒤 2.1kg과 1.8kg의 남매를 조기 출산했다. 아내는 “피부가 좀 검다”고 물으니 병원에서는 “황달 때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어쨌든 부부는 뛸 듯이 기뻤다.
생후 6개월이 지나면서 쌍둥이의 피부색은 눈에 띄게 황갈색으로 변했다. 남편은 은근히 의심이 생겼다. 쌍둥이가 피부색도 다르고 생김새도 아내를 닮았을 뿐 자신과는 딴판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DNA 검사를 해 보니 아버지가 아시아계라는 판정이 나왔다.
아내는 남편이 자신과 아이들 곁을 떠날까봐 남몰래 몸을 떨었다. 자신이 마치 부정을 저지른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주변 사람들의 의아스러워하는 시선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아들이 백인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쫓겨나는 차별의 설움도 당했다.
시험관 시술을 담당한 병원에서는 누구의 책임인지 밝히지 않았다. 3년간의 승강이 끝에 확인한 생부는 아버지 노릇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가정이 산산조각 나는 두려움 속에 두 사람은 항우울제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극복=A 씨 부부는 주변에 쌍둥이를 입양했다고 알렸다. 인종 차별을 피해 아시아계 학생들이 있는 지역으로 이사도 갔다. 2년 전 아이들이 “왜 우리는 엄마 아빠와 피부색이 달라요?”라고 묻자 “시험관 수정 때 실수가 있었단다”라고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8만 파운드(약 1억4000만 원)를 들여 실제 입양 절차도 마쳤다. 법원 결정에 따라 1년에 2차례 생부에게 아이들의 성적표와 사진 등의 자료를 보낸다. 아이들이 원하면 생부를 만나도록 허락할 생각이다.
아내는 “쌍둥이 남매는 우리 아이들이에요. 남편은 훌륭한 아빠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이들을 사랑한답니다”라고 말했다. 남편은 “내가 비록 생부는 아니지만 쌍둥이는 내가 사랑하는 내 아이들입니다”라고 화답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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