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하오 베이징]‘톈안먼 사태’ 17주년

  • 입력 2006년 6월 5일 03시 00분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건 당시 맨몸으로 탱크를 막아서 중국 민주화 항쟁의 상징으로 떠올랐던 왕웨이린(王維林·가명)이 현재 대만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톈안먼 사건은 중국 정부가 그해 6월 5일 새벽 톈안먼 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며 연좌시위를 벌이던 학생, 노동자, 시민을 무력으로 강제 해산시킨 사건. 탱크를 동원해 100만 명이 넘는 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최고 1400명의 사망자와 1만 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웨이린은 당시 중국 당국의 체포망을 피해 대만으로 피신했으며, 현재 대만 남부에서 타이베이 구궁(故宮)박물관의 고문으로 일하며 살고 있다고 홍콩 밍(明)보가 4일 보도했다.

톈안먼 광장에 진주해 들어오던 탱크 4대를 막아선 사진이 전 세계로 타전되면서 왕웨이린은 항쟁의 상징적 인물로 떠올랐으나 이후 종적을 감춰 생사가 불분명했다. 이번에 그의 행적이 확인됨에 따라 중국 당국이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의 밀령에 따라 왕웨이린을 찾아내 처형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그와 친구 사이라는 홍콩의 한 교수에 따르면 당시 후난(湖南) 성 창사(長沙)에서 마왕퇴(馬王堆) 고고학발굴단 단장으로 일했던 왕웨이린은 톈안먼 광장에서 민주화 시위가 벌어지자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상경했다. 베이징(北京) 노동자 자치연합회 회원이 된 왕웨이린은 6월 4일 탱크를 막아선 뒤 다음 날 동료들의 도움으로 베이징을 떠났다.

왕웨이린은 이후 홍콩을 거쳐 대만으로 건너간 뒤 결혼까지 했으나 나이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밍보는 “왕웨이린은 현재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지만 이번에 자신의 처지를 공개함으로써 당시 외쳤던 민주와 자유의 이상을 중국 인민들에게 전하고 싶다는 뜻을 피력했다”고 전했다.

▼젊은 세대 “톈안먼 사태? 그런 일 있었나요”▼

4일은 ‘톈안먼 사건’이 발생한 지 17주년이 되는 날이다. ‘피의 일요일’로 불리는 이날이 올해는 공교롭게도 일요일이다.

이날 톈안먼 광장은 이를 전혀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평온했다. 중국 정부 역시 한마디 논평이나 행사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재평가 요구가 17년째 계속되고 있는 등 이 사태의 후유증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오늘이 그날 맞아?”=4일 오전 중국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광장은 관광객들로 붐볐다. 광장 구석구석에 서 있는 공안과 무장경찰, 사복경찰의 수가 평소보다 약간 늘었지만 감지하기 어려울 정도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이날을 잊은 듯했다. 관광객 우모(45) 씨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느냐”는 질문에 눈만 껌벅거렸다. 20대 중반 이하 세대는 사건 자체를 잘 알지 못했다. 대학생 천모(23) 씨는 “학교에서 배우지 않아 모르겠다”고 한마디 던진 뒤 기념사진을 찍기에 바빴다.

중국 언론에도 관련 보도는 단 한 줄도 없었다. 홍콩 언론만이 유일하게 ‘톈안먼 어머니(天安門母親)’ 모임의 재평가 요구를 간단히 보도했다.

▽머나먼 재평가의 길=대다수 한국 언론은 ‘톈안먼 사태’ 또는 ‘톈안먼 사건’이라고 중립적으로 부르지만 중국 정부는 ‘반혁명(反革命) 폭란(暴亂)’이라고 부른다. 폭란이란 폭동이나 반란과 비슷한 뜻이다. 반면 유럽의 서방국가는 ‘톈안먼 광장 대학살’이라고 부른다. 대만이나 홍콩은 ‘6·4사건’이라고 지칭한다.

톈안먼 사건 희생자 유족 모임인 ‘톈안먼 어머니’나 당시 시위 주도자들은 중국 정부의 평가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당시 시위는 민주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정당한 요구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톈안먼 사건에 대한 재평가 논란은 1997년 덩샤오핑(鄧小平)이 사망했을 때와 제4세대 지도부가 출범한 직후인 2004년에 비교적 활발했다.

톈안먼 사건 직후 권좌에 오른 장쩌민 전 국가주석이 권력에서 물러났기에 많은 사람이 재평가를 기대했지만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은 이를 거부했다.

그는 2004년 10월 프랑스를 방문한 자리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이는) 엄중한 정치사건”이라고 말해 ‘반혁명 폭란’이라는 당초 입장에서 다소 후퇴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당시 조치는 정당했다”며 재평가 요구를 일축했다.

▽끝나지 않은 후유증=중국인에게 톈안먼 사건은 언급하지 말아야 할 ‘금기(禁忌) 1호’이다. 문화대혁명에 대해서는 의견을 말하다가도 톈안먼 사건이 나오면 입을 다문다.

당시 시위 주도자들은 대부분 망명객 신세다. 학생운동의 막후 지도자였던 왕단(王丹)은 10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1998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당시 학생들의 시위를 ‘애국활동’이라고 평가했다가 당 총서기직에서 물러난 자오쯔양(趙紫陽)은 지난해 1월 사망했지만 사후에도 복권이 되지 않고 있다.

베이징=하종대 특파원 orion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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