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으로 말하자면 문민 통제에 관한 연구는 정군(政軍)관계론이라는 분야에서 해 왔다. 그 배경에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독일이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일본처럼 군이 과도한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무모한 전쟁에 뛰어드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2차 대전 후에도 미국 정치에서 대통령과 군의 관계라면 어떤 대통령이 군을 통제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만 논의됐다.
결과를 놓고 보자면 선진국에서는 문민 통제가 거의 지켜져 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에서 군사정권은 태어나지 않았고 군이 독주해 전쟁이 시작되는 사태도 없었다. 미국이나 서유럽, 일본에서는 문민 통제, 즉 문민정치가가 군의 폭주를 막는 제도는 거의 반석에 올랐다고 생각됐다.
1960년대 이후 정군관계론은 주로 비(非)서구 국가에 눈을 돌렸다. 브라질이나 한국, 인도네시아 같은 비서구 국가에는 군사정권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나라에서도 군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역시 문민 통제가 실현돼 왔다. 지금 ‘군의 폭주’에 의해 전쟁을 일으킬 위험이 있는 나라는 세계에서 매우 한정돼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가령 군의 힘이 제도에 눌려 있다고 해도 문민정치가가 전쟁을 요구할 경우 전쟁을 멈출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금 진행 중인 전쟁의 대부분은 문민정치가가 주도해 벌인 것이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략한 후 벌어진 걸프전을 보자. 밥 우드워드 씨의 ‘사령관들’에서는 이라크 개입에 주저하는 콜린 파월 참모총장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당시 전쟁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조지 부시(아버지) 대통령이나 딕 체니 국방장관 등 문민이었다. 파월 참모총장을 비롯한 군인들은 전쟁에 소극적이었지만 문민의 판단에 떠밀렸다.
2003년 이라크전쟁도 마찬가지다. 조지 W 부시(아들) 대통령이나 체니 부통령,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 같은 문민정치가가 전쟁을 요구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때 미군이나 중앙정보국(CIA)은 전쟁 수행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이라크에 대한 전쟁 계획이 있다는 것을 LA타임스가 2002년 여름에 보도했는데 그 상세한 내용으로 볼 때 군에서 정보가 새어 나간 것이 확실하다. 전쟁에 소극적인 군이 전쟁 계획을 흘린 것이다.
미국만이 아니다. 미국과 협력해 이라크에 파병한 영국에서는 외교관뿐 아니라 군인들도 의문을 제기했으나 토니 블레어 총리는 전쟁을 밀어붙였다. 군국주의의 과거를 가진 일본에서도 이라크에 자위대를 파견한 것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판단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군인이 요구하는 전쟁의 시대 대신 ‘정치가가 전쟁을 요구하는 시대’가 시작된 듯하다.
문민정치가가 전쟁을 요구할 경우 문민 통제에 의해 그 전쟁을 막을 수는 없다. 또 문민 통제가 지켜지고 있는 한, 군이 아무리 전쟁에 반대하더라도 전쟁 개시를 저지할 수도 없다. 즉, 전쟁을 원하는 정치가가 등장했을 때 문민 통제는 전쟁 억제가 아니라 전쟁 수행을 보장하는 쪽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문민 통제에 의해 불필요한 전쟁을 피할 수 있었던 시대는 이미 끝났다. 군의 폭주가 아니라 정치가의 폭주를 어떻게 저지할 수 있을 것인가. 냉전 후 정군 관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군이 아니라 정치가 쪽일지도 모른다.
후지와라 기이치 도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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