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을 삼켜버릴 듯한 불길은 영화관 스크린 속에서 일어났다. 대지진이 일어나고 화산이 분출해 결국 일본열도가 서서히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이 상황은 영화 ‘일본침몰’(日本沈沒)의 내용이다. 극장으로 출동한 소방차는 8억원이 넘는 비용을 들여 마련한 초호화 영화시사회 이벤트에 사용됐다. 주제가를 부른 우리나라 가수 선민도 깜짝 출연해 행사 분위기를 더욱 뜨겁게 달궜다.
일본침몰은 문학가 코마츠 사쿄(小松左京)가 1973년에 쓴 소설로 1년에 400만부가 팔린 베스트셀러다. 같은 해 제작된 영화 역시 65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기록을 세웠다. 33년이 지난 지금 일본은 영화로 다시 일본열도를 침몰시키고 있다. 이번에는 170억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비용을 들여 초대형 블록버스터로 제작했다.
유난히 지진과 화산으로 고통 받는 일본 사람들은 왜 스스로를 바닷속으로 가라앉히려고 할까. 정말 일본열도는 바닷속으로 가라앉아 전설의 땅이 될 수도 있는 걸까.
침몰 블랙박스 동해에 있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서는 탄성파로 해저지형을 탐사해 동해의 바닷속에 거대한 땅덩어리 조각들이 가라앉아 있다는 것을 밝혔다. 이 땅덩어리 조각들과 일본열도를 퍼즐처럼 대륙에 맞춰 보면 신기하게도 딱 들어맞는다. 그러면 동해는 어떻게 생겨난 걸까. 지질학자들은 동해 해안가의 암석과 해저 지형의 암석시료를 분석해 이 수수께끼를 풀어냈다. 이 암석시료가 바로 동해 생성과 침몰의 블랙박스인 셈이다.
지금으로부터 2500만년 전, 일본은 유라시아대륙에 속했다. 마치 남미대륙의 안데스산맥처럼 장엄한 화산대가 유라시아대륙의 동쪽해안선을 따라서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그 화산대 동쪽에는 태평양이 서쪽에는 대륙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화산대와 멀리 떨어진 대륙평야 한 가운데가 천천히 부풀어 오르더니 땅이 흔들리고 여기저기 화산이 분출하기 시작했다. 검붉은 용암이 흘러내리고 갈라진 땅 틈으로 뜨거운 증기가 솟아올랐다.
오랜 지질시대동안 잠잠했던 대륙평원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났던 걸까. 그 원인은 동북아시아(지금의 만주-함경도-동해부근) 대륙지각 아래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마그마 열기둥인 ‘맨틀플룸’(mantle plume) 때문이었다. 그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맨틀 대류가 왕성하게 일어났다. 200만년 뒤, 화산활동이 극도에 달하면서 마침내 대륙지각이 갈라지고 땅덩어리가 아래로 깊게 꺼지면서 그 사이로 맨틀이 올라와 새로운 해양지각이 생겨났으며, 바닷물이 밀려들어 왔다. 동해가 막 형성되는 순간이다.
대륙의 동쪽에 늘어섰던 지금의 일본은 대륙에서 분리되면서 대륙과 멀어져 동해는 점점 더 확장됐고 일본은 열도로서의 숙명을 맞게 된다. 남쪽으로 밀려 내려가던 일본열도는 적도 아래에서 북상해 온 필리핀해판과 충돌해 지금처럼 휘어진 형태를 갖게 됐다. 동해가 넓어지는 과정에서 일본열도와 한반도 사이에 껴있던 대륙조각들은 엿가락처럼 늘어져 얇아지면서 동해의 깊은 바닷속으로 완전히 침몰해 버렸다.
영화 일본침몰은 그 옛날 일어났던 이 무서운 대륙 침몰사건이 오늘날 일본열도를 무대로 다시 벌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본인들의 마음에 숨어있는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영화에서 일본을 침몰시킨 원인은 지진과 화산이다. 세계 지진의 10%가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14만3000명이 사망했던 1923년 관동지진과 5500명의 사망자를 냈던 1995년 고베지진과 같은 악몽은 일본인의 기억에 계속 남아 있다.
침몰할 수 없는 일본열도
일본에 지진과 화산이 많이 일어나는 이유는 판의 경계부 때문이다. 지진은 주로 지각 아래에 있는 거대한 판이 다른 판과 충돌하면서 생기는데, 일본 주변에는 판이 4개나 모여 있다.
일본열도는 크게 유라시아판에 속하는 서남일본과 북아메리카판에 속하는 동북일본으로 나뉜다. 서남일본은 필리핀해판이 빗겨서 들어가기 때문에 지층과 지층의 변이가 수평으로 어긋나는 단층인 주향이동단층이 많다. 반대로 동북일본은 태평양판이 정면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압축력으로 상반이 위로 밀려 올라가는 역단층이나 충상단층이 대부분이다.
특히 태평양판은 일본을 지나 동해 아래로 낮은 각도로 깊숙이 들어가고 있는데, 이런 작용은 동북일본을 포함해 동해를 동서 방향으로 압축하고 있다. 지각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으려면 과거 동해가 형성되었을 때처럼 늘어나야 하는데 반대로 압축하는 힘을 받고 있기 때문에 침몰할 가능성이 없다. 마치 고무공을 양쪽에서 누르면 수직 방향으로 튀어 나오는 것과 같다.
결국 영화처럼 동북일본열도가 남북으로 길게 갈라질 수도 없거니와 열도 전체가 침몰한다는 것은 지질학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백년마다 돌아오는 서남일본지진
1995년 1월에 일어난 강도 7.2의 고베지진. 조선, 철강산업의 중심지인 고베시 반경 100km 안에 집중 발생했다.
일본 교토대의 오이케 교수는 서남일본의 지질 구조와 지진 관측을 통해 서남일본 지진의 백년 주기설을 주장했다. 필리핀해판이 서남일본의 지각 밑으로 들어가는 섭입대에서 지진이 발생하면, 약 70년간 지진 활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그 뒤 30년간은 휴진기라는 것이다.
서남일본은 1890년부터 1960년까지 약 70년 동안 지진이 자주 일어났고, 1960년 이후 1990년까지 약 30년간 드물다가, 1990년 이후 다시 활발히 일어났다. 만약 이러한 경향이 계속된다면 서남일본에서는 2060년까지 지진이 활발히 일어날 것이며, 특히 2020년에서 2030년까지는 굉장히 많은 지진이 일어난다고 추측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판이 지각 아래로 들어가 일본열도에 응력이 축적되며 주기적으로 지표면에 발달된 활단층대를 통해 해소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한번 축적된 응력이 다 해소되는 데에 약 70년이 걸리는 셈이다.
미국 지질조사소(USGS)는 매년 지구에서 발생하는 지진에너지가 대략 일정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지구는 끊임없이 지진을 일으켜 에너지를 방출하는데, 지구 전체에 일어난 지진에너지의 합이 매년 비슷하다는 것이다. 작은 지진이 여러 번 일어나면 그만큼 큰 지진이 일어날 확률이 적어진다.
세계에서 발생하는 지진에너지는 초당 150억W로 매우 크다. 하지만 사람이 섭취하는 음식물의 열량으로 계산해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사람이 하루 섭취하는 음식의 평균 열량을 약 2000kcal라고 하면 초당 약 100W가 된다(1kcal=4184W). 현재 인구 약 60억명의 총량은 6000억W이므로 지진에너지 보다 40배나 크다.
한반도는 안전지대인가
지진은 일본, 대만, 멕시코와 같이 판 경계부 국가들에게 큰 피해를 입힌다. 특히 터키, 이란, 중국, 인도처럼 대륙판과 대륙판이 충돌하는 경우에는 대륙 내부 깊숙이까지 큰 충격이 가해진다.
한반도는 다행히 유라시아대륙과 태평양판과의 경계부에서 수백 km 떨어져 있어 화산과 지진의 격렬한 위험에서 조금은 벗어나 있다. 하지만 지진의 안전지대는 아니다. 다만 판 경계부의 국가에 비해 훨씬 안정한 땅덩어리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한반도 주변에 있는 판들은 각각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한반도가 속한 유라시아대륙은 동쪽, 인도대륙은 북쪽, 태평양판은 서쪽, 필리핀해판은 북쪽으로 움직여 지각을 변화시킨다. 이런 움직임은 한반도를 동서 방향으로 압축하고 있다.
압축시키는 에너지는 지진으로 발산되기도 하는데, 남한에는 커다란 단층계가 에너지 발산의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경주, 포항, 울산, 양산, 부산 일원의 양산단층계와 원산, 철원, 의정부, 서울, 홍성 일원의 추가령단층계 및 강원도에서 전라도를 가로지르는 옥천대가 경계 지역에 속한다.
지난 1978년부터 관측한 지진기록을 분석해 보면 경주, 홍성, 부산, 지리산, 영월 등지에서 지진이 많이 일어났는데, 주로 이 단층계에 속한 지역이다. 아직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등 심각한 피해를 주지는 않았지만, 양산단층계와 추가령단층계를 따라 인구가 밀집된 도시가 분포하고 있어서 큰 피해를 입을 위험은 항상 존재한다.
적어도 몇 세기 이내에 한반도에서 고베나 타이완에서와 같은 규모 6, 7 정도의 큰 지진이 일어날 확률은 매우 적다. 하지만 만일 1987년에 일어났던 홍성지진처럼 규모 5 정도의 지진이 인구가 밀집된 지역에 일어났을 때, 얼마나 안전하게 대처할 수 있을지 냉정히 생각해 봐야 한다.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에 대해 준비하는 것은 우리 사회와 자신의 안전을 위한 일종의 보험이다. 어떤 옵션의 보험을 들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지진파에서 핵실험 탐지까지 - 지진연구센터
대전에 있는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은 올해로 30주년을 맞이해 새로운 건물을 하나 지었다. 건물의 이름은 지진연구동으로 지진에 관련된 여러 연구실을 한데 모았다. 핵심 시설은 1층에 있는 지진연구센터로 한쪽 벽을 가득 메운 스크린은 전국에 있는 지진관측소에서 보내온 정보를 실시간으로 보여 주고 있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 기상청, 철도공사, 한국전력연구원, 수자원공사,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는 각각 필요한 장소에 지진계를 설치해 관측하고 있지만 서로 공유를 하지 못했다. 지진연구센터는 이런 여러 정보를 모아 분석하는 통합시스템을 만들었다. 수만 개의 지진관측소를 보유한 일본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지진 발생 빈도로 보아 전체 300여 개 정도가 세워지면 그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
지헌철 지진연구센터장은 “전국에 설치된 관측소로부터 실시간으로 정보가 들어와 지진이 발생했을 때 12초 만에 지진 경보를 알릴 수 있다”고 밝혔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은 국가정보센터(NDC)로 지정돼 지진파와 음파를 관측해 지진 감지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의 핵 실험을 감시하는 기능도 한다.
글 이윤수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지질기반정보연구부 선임연구원ㆍleeys@kigam.re.kr
이윤수 박사는 | 일본 교토대에서 고지자기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선임연구원으로 동아시아 조구조와 지체구조, 고기후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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