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 전통의 트리니티대에서 만난 사람들의 공통된 이야기다. 유럽의 명문대학이며 신학 철학 역사학 등 순수 인문학의 발상지로는 어울리지 않는 대답이다.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 시내 5만7000여 평의 캠퍼스에 자리 잡은 이 대학의 ‘올드 라이브러리’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9세기 필사본 복음서(The Book of Kells)가 보관돼 있다. 425만 권의 장서를 보유한 이 도서관은 유럽에서 가장 큰 도서관 중 하나다.
그뿐 아니다. 조너선 스위프트, 올리버 골드스미스, 오스카 와일드, 사뮈엘 베케트와 같은 문호를 비롯해 로언 해밀턴 같은 수학자, 원자력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한 어니스트 월턴과 같은 과학자가 거쳐 간 곳이다. 아일랜드 최초의 대통령인 더글러스 하이드와 메리 매컬리스 현 대통령, 메리 로빈슨 전 대통령이 이 대학을 나왔거나 교수로 일했다.
이만하면 전통으로 그럭저럭 명성을 유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대학은 수요자 중심의 교육을 외치며 끊임없이 개혁을 도모하고 있다.
역사학과 교수이기도 한 딕슨 처장은 “전통학문과 신학문 사이에 균형을 잡는 일이 중요하다”며 “사회의 요구에 따라 학부 과정을 혁신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2002년부터 도입하고 있는 ‘브로드 커리큘럼’이 대표적. 학생들에게 전공과목 외에 다양한 학문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 준다.
2학년과 3학년은 자기 전공 외에 문학 영상 인문 사회 철학 심리학 정치학 국제학 환경법 환경변화학 경영학 역사학 지역학 등을 폭넓게 수강한다.
또 이들은 전공이 다른 학생들과 소규모 그룹 활동을 하면서 아이디어를 나누고 발표력을 키운다.
일부 과정의 경우 복수전공을 의무화했다.
인문학부 4학년인 키트 오마호니(24) 씨의 전공은 프랑스어와 러시아어다.
오마호니 씨는 “언어에 관심이 있고 아일랜드에서 유일하게 러시아어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트리니티대를 선택했다”며 “중고교 시절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에 매료돼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러시아 문학을 배우고 싶었다”고 말했다.
복수전공자는 두 전공을 3년간 이수하고 4학년에서 한 과목을 택해 심화과정을 공부한다. 학위는 두 곳에서 모두 나온다.
복수전공이 아니라 아예 이종 학문을 통합해 전공으로 만든 경우도 있다.
시장친화적인 교육도 이 대학의 특징. 공과대와 상경계의 경우 현장 위주의 강의와 실습으로 교육과정이 짜여 있다. 대학의 수요자인 기업에 맞춰 기술과 어학실력을 갖춘 인재를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브로드 커리큘럼’과 복수전공이 수요자에 맞춘 인재 양성이 목적이라면 연구중심 대학으로의 재편은 대학원 교육의 질을 향상시키고 연구의 기초를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딕슨 처장은 “연구를 활성화하기 위해 전체 재학생의 4분의 1에 불과한 대학원생 수를 3년 안에 2배로 늘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2005년 확보한 연구기금은 모두 6390만 유로로 이 중 정부의 교부금은 18%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과학발전기금 기업진흥청 유럽통합위원회 등에서 따낸 것이다. 연구기금은 교수나 학과, 28개 연구센터 및 교내기업 양성소를 통해 투입된다.
교내기업 양성소는 연구 성과를 직접 산업과 연결시키는 곳이다. 대학과 기업진흥청이 손잡고 1986년 문을 열었다.
기업진흥청 프랭크 오코너 국제교육부장은 “연구기금으로 연구의 기초를 닦는 한편 그 성과를 바탕으로 상품을 생산한다”며 “산업과 연결시켜야 일자리 창출도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교내기업 양성소에는 정보기술(IT) 생명기술(BT)을 다루는 소규모 미니 벤처들이 입주해 있다. 학생들은 이곳에서 프로젝트를 수행하거나 창업한다.
그동안 40여 개의 기업이 이 양성소를 통해 만들어졌다.
1991년 이 대학 컴퓨터학부 학생들이 세운 벤처 ‘아이오나 테크놀로지’가 미국 나스닥에 상장되기도 했다. 이 기업은 18개의 소규모 기업을 탄생시켰다.
이 같은 노력의 결과로 트리니티대는 아일랜드에서는 유일하게 외국의 대학과 언론기관이 발표하는 세계대학 순위에서 100위권에 들고 있다. 더 타임스의 2004년 11월 조사에서는 87위였다.
■ 아일랜드의 실용적 대학운용
트리니티대는 아일랜드에서 역사가 가장 길다. 1592년 영국 엘리자베스 1세가 옥스퍼드 및 케임브리지대를 모델로 세웠다.
아일랜드에는 트리니티대를 포함해 모두 7개의 국립대와 사학재단에서 운영하는 10개의 공인사립대가 있다. 또 과학 기술 엔지니어링 컴퓨터 보건 호텔경영 디자인 등을 가르치는 14개 기술대가 있다. 다른 유럽국가처럼 학부생의 수업료는 없으며 정부가 부담한다. 아일랜드 학생은 물론 유럽연합 학생은 학생회비나 기숙사비 외에는 무료라는 얘기다.
물론 유럽연합이 아닌 외국 유학생과 대학원생은 전공에 따라 수업료를 낸다. 트리니티대의 경우 인문사회계열 대학원생은 연간 4365유로, 엔지니어링 보건 언어학은 5782유로를 낸다. 같은 대학원생이라도 외국 유학생의 경우 수업료는 인문사회계열이 1만2920유로, 엔지니어링 보건 언어학은 1만6929유로로 국내학생에 비해 3배 정도 비싸다.
아일랜드의 대학진학률은 50%를 웃돈다. 실용적 학문에 대한 수요가 높아 졸업생의 57%가 과학 공학 컴퓨터 경영 등을 전공한다. 이와 관련해 매년 겨울이면 아일랜드 포럼이 열려 정부와 교육기관, 학부모들이 기업체의 인력수요를 진단하고 대학의 학과 신설과 정원 문제를 논의한다.
대학에서는 정규적인 학위과정 외에도 개인의 학업과 취업목적에 맞춰 수료증(Certificate·1년) 국가수료증(National Certificate·2년) 졸업증(National Diploma·3년) 준석사학위증(Graduate Diploma·1년 석사수료) 등 실용적이면서 융통성 있는 과정을 운영한다.
더블린=김진경 기자 kjk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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