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은 이날 오전 1시경 레바논 남부마을 카나를 폭격했다. 공습으로 무너진 4층짜리 건물의 잔해 속에서는 최소 54구 이상의 시신이 발견됐다. 12일 공격이 시작된 이래 단일 공습으로는 최대 규모의 피해다. 절반 이상인 37구의 시신은 잠옷을 입은 어린아이였다.
무너지는 건물 더미에 으스러진 어린아이와 여성의 시신이 TV 방송 카메라에 그대로 잡혔다. 현장에 있던 생존자들은 “공습으로 도로가 끊겨 미처 피하지 못한 채 건물 지하 등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폭격에 희생됐다”며 분노했다.
참상이 알려지자 베이루트 도심에서는 시민 5000여 명이 거리로 몰려나와 이스라엘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성난 군중은 유엔 레바논 본부로 난입해 “이스라엘과 미국에게 죽음을” 등의 구호를 외치며 유리창을 깨고 유엔 깃발을 찢었다.
상황이 악화되자 이스라엘 정부 대변인은 “카나 바로 옆에 위치한 헤즈볼라의 로켓 발사 지역을 겨냥한 것일 뿐 민간인을 해칠 의도는 아니었다”고 해명에 나섰다. 이스라엘 측은 “이번 실수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겠다”면서도 “헤즈볼라가 민간인을 인간 방패로 사용하려 한다”며 책임을 떠넘겼다.
사태가 대화로 해결될 전망은 한층 더 희박해졌다. 푸아드 알시니오라 레바논 총리는 사건 직후 기자회견을 열어 “무조건적이고 즉각적인 휴전이 이뤄지기 전에는 미국 등과 어떤 대화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유엔은 카나 사태가 발생하자 이날 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 소집해 중동 위기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다.
이날 저녁 레바논에서 알시니오라 총리와 회담하려던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의 계획도 취소됐다. 라이스 장관은 지난주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참석에 앞서 중동에서 양국 정상을 만났으나 성과를 내지 못했다. 알시니오라 총리에게서 “이스라엘인의 눈물 한 방울이 레바논인의 피 한 방울보다 갚진가”라는 항의만 받았을 뿐이다.
외신은 일제히 “외교적 시험대에 오른 라이스 장관의 노력이 벽에 부딪쳤다”고 보도했다.
라이스 장관은 29일 이스라엘에서 에후드 올메르트 총리를 만나 해법을 모색하던 중이었다. 두 사람은 국경지대에 1만5000∼2만 명 규모의 평화유지군을 배치하는 방안 등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카나 폭격에 앞서 이스라엘은 29일 유엔이 노약자 및 부상자를 이송하기 위해 양측에 촉구한 72시간의 휴전 제의를 거부했다. 28일 레바논 정부가 제시한 평화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협상은 없다’며 강경 입장을 고수하던 헤즈볼라가 6시간 동안 진행된 레바논 내각회의 끝에 28일 서명한 평화안이었지만 이스라엘은 ‘진실성이 약하다’며 이를 단칼에 내쳤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타임 “이軍 유엔감시소 알고도 공격”
25일 유엔 감시단원 4명이 숨진 사건을 놓고 유엔과 이스라엘은 서로 “고의적이다”, “우발적이다”라며 계속 공방을 벌이고 있다. 시사주간지 타임(30일자)에 따르면 레바논 남부 키암에 있던 유엔정전감시기구(UNTSO) 소속 감시단원들이 일하던 곳은 3층 건물이었다. 흰색 외벽에는 검은색으로 ‘UN’이라는 글자를 큼지막하게 써놓았고 유엔기(旗)도 늘 내걸었다. 쉽게 식별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25일 오후 1시 20분경 이스라엘군 전투기가 쏜 미사일이 감시소에서 270여 m 떨어진 곳을 강타했다. 레바논 주둔 유엔평화유지군(UNIFIL)은 이스라엘군에 “미사일 1발이 감시소에 너무 가깝게 떨어졌다”고 경고를 보냈다.
그러나 이후 6시간 동안 미사일 10발과 155mm 자주포 4발이 감시소 근방 90∼270m에서 연이어 폭발했다. 매번 UNIFIL은 “너무 위험하다. 발사를 중단하라”고 무전을 쳤다. 그때마다 이스라엘군은 “목표를 조정하겠다”고 응답했을 뿐이다.
결국 이날 오후 7시 20분에 미사일 2발이 감시소를 정통으로 맞혔다.
이 진 기자 lee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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