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갱도에 물 철철 넘쳐도 채탄 계속 시켜”

  • 입력 2006년 8월 7일 03시 07분


조세이 탄광 수몰사건의 생존자인 설도술 옹은 “사고가 나기 3, 4일 전부터 갱도로 흘러드는 바닷물 양이 급격히 늘었지만 일본인 근로감독관들이 작업을 강행해 희생을 키웠다”고 증언했다. 포항=윤완준  기자
조세이 탄광 수몰사건의 생존자인 설도술 옹은 “사고가 나기 3, 4일 전부터 갱도로 흘러드는 바닷물 양이 급격히 늘었지만 일본인 근로감독관들이 작업을 강행해 희생을 키웠다”고 증언했다. 포항=윤완준 기자
“탄광이 무너지기 3, 4일 전부터 일본인 근로감독관들이 물이 새는 곳에 상주했어.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무 말 않은 채 작업만 계속 시켰지.”

광복절 61주년을 앞둔 6일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 금오리에서 만난 조세이(長生) 탄광 생존자 설도술(89) 옹은 사고 당시 일본인들이 갱도로 바닷물이 새는 것을 알면서도 사전 조치를 취하지 않아 한국인 희생자가 늘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설 옹은 1942년 수몰돼 한국인 130명 이상이 희생된 일본 야마구치(山口) 현 우베(宇部) 시 조세이 탄광 한국인 강제징용자 중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두 번째로 확인된 생존자.

본보 4월 22일자 A3면 참조
▶日帝때 수몰 조세이 탄광 韓人생존자 첫 확인

설 옹은 생존자로 처음 확인된 김경봉(84) 씨보다 탄광에서 더 오래 일했고 사고 뒤에도 탄광에 머물러 사고 전후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물새는 것 알면서도 알리지 않아”=설 옹은 탄광 측이 갱도를 해저 깊숙이 바닷물 바로 아래까지 무리하게 확장해 갱도 천장 위에서 배의 기관 돌아가는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였다고 당시 상황을 기억했다.

탄광 측은 바다 위로 이어진 환기구를 통해 갱도에 고인 바닷물을 빼냈지만 수몰 사고 3, 4일 전부터는 갱도로 새는 바닷물의 양이 급격히 늘었다는 것.

일본인 근로감독관 2명이 누수량을 쟀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사고 위험에 대해 알리지 않은 채 작업을 강행했다.

수몰사고가 발생한 1942년 2월 3일 오전 9시경 설 옹은 숙소에서 잠을 자고 있어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결혼을 위해 고향에 다녀오느라 작업조가 바뀐 덕분이었다.

“사고 당일 오전 4시에 숙소로 돌아올 때 이미 갱도에 바닷물이 철철 넘치는데도 일본인 근로감독관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어. 그때 사람들을 대피시켰더라면….”

▽“밀린 임금 주겠다며 계속 일 시켜”=한국인 징용자들은 귀향을 원했지만 탄광 측은 “밀린 임금을 주겠다”며 수몰사고가 난 제1탄광 인근의 제2탄광에서 일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이 탄광 역시 제1탄광에 앞서 20여 년 전 수몰된 곳이었다.

설 옹은 이곳에서 열흘가량 일하다가 탄광 측이 임금 지급을 미루자 결국 탈출했다. 설 옹은 “고향 장기면에서만 수십 명이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면서 “올해도 어김없이 광복절은 다가오는데 일본 정부는 사과도 배상도 없다”며 씁쓸해했다.

포항=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조세이탄광:

바다 밑 10여 km까지 갱도가 뚫려 있던 일본 최대의 해저 탄광. 이 탄광의 수몰사고는 1915년 광원 235명이 희생된 히가시미조메(東見初) 탄광 수몰사고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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