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오전 1시 뉴올리언스의 도심 관광특구인 ‘프렌치 쿼터’는 록그룹의 강렬한 비트, 흑인 브라스밴드의 재즈 연주로 시끌시끌했다. 스트립쇼를 하는 술집의 호객행위가 이어졌고, 짙은 남부의 맛을 자랑하는 케이준 식당은 자정 녘까지 북적거렸다. 언뜻 보면, 언제 1577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재앙이 이곳을 강타했는지 모를 정도다.
그러나 약 1800곳의 관광 식당은 절반만 영업을 재개한 상태다. 인기 절정의 TV 요리프로 호스트인 ‘미스터 에미럴’이 만든 체인식당도 점심 때는 주 1회만 문을 열 정도다. 웨이터인 제임스 씨는 “손님도 별로 없지만, 낮 시간에는 일할 종업원도 구할 수 없다”며 곳곳에 나붙은 구인광고를 가리켰다.
눈길을 조금만 외부로 돌리면 뉴올리언스의 복구가 얼마나 더딘지 단박에 알 수 있다. 물론 1년 전 이재민 수용소로 사용됐던 슈퍼돔, 컨벤션센터처럼 눈에 잘 띄는 대형 건물들은 이미 단정하게 정비돼 있었다.
텅 빈 주유소에 앉아 소일하던 디트리어 슬로터(44) 씨는 기자를 보자마자 정부와 백인을 싸잡아 욕했다. 그는 기자에게서 “워싱턴에서 왔다”는 말만 듣고 “조지아 주, 텍사스 주를 거쳐 6월에 집으로 돌아왔지만, 지원금은 1달러도 못 받았다. 미국 정부의 일처리가 왜 이 모양이냐”고 흥분했다. 그의 손에는 볼펜으로 휘갈겨 쓴 항의 메모지가 1장 들려 있었다. 그는 “당장 팩스로 보내겠다”고 했다.
연방정부 및 주정부가 주민들에게 1인당 평균 1만2000달러를 현금으로 지급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러나 수혜자의 상당수가 일자리 없이 사회보장비로 연명해 온 주민들이라는 점에서 정부 예산의 무분별한 지출을 의심하게 만든다. 특히 공화당 행정부는 “제도로 사회적 약자를 도와야 옳지, 구체적 이익을 손에 쥐여 줄 수 없다”는 철학을 갖고 있지 않은가.
자동차에 동승해 지금은 복구된 제방붕괴 현장을 돌아본 로버트 페닝턴 씨는 백인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집값 비싼 고지대에 살아온 백인들은 피해도 적었고, 복구 역시 빨랐다. 기자가 1년 전 같은 장소에서 수해 현장을 취재할 때 귀가 닳도록 들었던 “백인 거주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제방을 붕괴해 흑인타운을 수몰시켰다”는 말이 또 나왔다. 세월은 약이 아니었다.
이들의 불평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전기와 식수가 단절된 채 사는 저소득층이 4만 명에 이른다.
실제로 도시 반대편의 백인 거주지역은 가지런히 정비돼 있었다. 한국 교민(1700명) 대부분이 사는 케너, 매터리 지역도 복구된 상태다.
그렇다고 뉴올리언스 사람들이 자포자기에 빠진 것만은 아니다. 24일은 성도미니크 초등학교가 1년 만에 문을 다시 연 날이다. 어린 학생들의 등교 모습을 지켜본 주민들은 “학교의 정상화는 미래를 밝게 해 준다”고 말했다. 대개가 정부에 불평을 토로하던 이들이었다.
뉴올리언스=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창고서 썩어가는 해외 구호품…보관료만 수백만 달러▼
지난해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남부 멕시코 만 일대를 강타한 뒤 해외 각국은 앞 다퉈 긴급 원조금과 구호품을 미국에 보냈다. 36개국에서 1억2600만 달러가 접수됐고 간이침대, 반창고 등 구호 물품도 봇물을 이뤘다.
이 원조금과 구호품은 모두 어떻게 됐을까.
미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는 24일 웹사이트에 올린 글에서 미 행정부의 관료주의와 무능 탓에 1년이 다 가도록 피해 주민들에겐 단 한 푼도 가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원조금 중 6600만 달러가 종교단체 구호기구에 넘겨졌지만 이 중 1300만 달러만 재건사업 근로자 월급으로 집행됐다. 나머지 6000만 달러는 무이자 계좌에 방치하고 있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돈만 까먹고 있는 셈이라고 포린폴리시는 덧붙였다.
엄청난 구호품도 창고에 장기간 처박아 둔 상태다. 정부회계감사원(GAO)은 보고서에서 “창고 보관료로만 수백만 달러를 지불했다”고 지적했다.
국무부와 연방재난관리청(FEMA) 등은 “전례가 없어서…”라고 변명하지만, 국제원조 처리절차 규정은 아직도 ‘작성 중’이다. 한 해외 근무 미국 외교관은 “그럴 거라면 ‘고맙지만 됐다’고 사양하지…”라고 한탄하는 전문을 국무부에 보내기도 했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