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로만 보면 여느 납치 사건과 다를 바 없었지만 예르세노예바 씨의 비밀스러운 삶이 알려지면서 사건은 여러 각도에서 조명을 받고 있다. 그가 공개적으로는 ‘체첸사회신문’의 기자로 활동했지만 사실은 7월 11일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의 특수작전으로 사망한 체첸의 무장세력 지도자 샤밀 바사예프의 숨겨진 부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여객기 공중납치, 베슬란 공립학교 인질극 등 강경 무장 투쟁을 벌여 온 바사예프는 러시아 정부의 현상수배자 중에서도 ‘영순위’ 인물이었다.
딸의 이중적인 생활에 대해 예르세노예바 씨의 어머니는 강압에 못이긴 강제 결혼이었다고 해명했다. 체첸 분리주의자들이 지난해 11월 그녀를 납치한 뒤 두 남동생을 살해할 것이라고 협박했기 때문이라는 것. 납치된 직후 결혼해 바사예프의 네 번째 아내가 된 그녀는 그동안 웹사이트에서 각종 정보를 내려받는 인터넷 업무를 맡아 왔다고 한다.
친(親)러시아단체의 협박을 받아 온 그녀는 17일 괴한들에게 납치된 뒤 아직 소식이 없다.
결혼 과정이 어쨌건 예르세노예바 씨 납치 사건은 지옥과도 같은 체첸의 이중적 자화상을 잘 보여 주는 사건이라고 뉴욕타임스가 26일 평가했다. 한편으로는 바사예프의 비밀스러운 삶이 하나둘 밝혀지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납치 사건이 만연한 체첸의 어두운 현실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체첸에서는 납치가 다반사다. 게다가 분리주의자나 친러시아 협력자 모두가 납치를 자행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편에 선다고 안전해지는 것도 아니다. 반군에 가담한 뒤 납치됐다고 거짓 신고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인권 기구들은 1999년 체첸과 러시아가 2차 전쟁을 벌인 이후 6000∼7000명에 이르는 체첸인이 사라졌다고 밝혔다.
예르세노예바 씨 납치 사건에 대해서도 러시아 당국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자발적 납치극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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