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영조]‘과거사 정리’ 중국을 배우라

  • 입력 2006년 9월 5일 03시 05분


최근 중국에서는 극히 조용한 가운데 일어났지만 매우 주목할 만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새로운 중고교용 역사교과서의 채택이 그것이다.

올가을 상하이(上海)와 칭다오(靑島) 등 일부 지역에서 시작해 2010년부터는 전국적으로 사용될 ‘새 표준 역사교과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사회주의 이념의 사실상 퇴출이다. 사회주의는 여전히 ‘영광스러운 미래’를 이끌 이념으로 소개됐지만 52개 단원 중 단 하나의 단원으로 축소됐고 개혁개방 이전의 사회주의 사회는 단 한 문장으로 압축됐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같은 고대사가 크게 축소된 대신 JP모건, 빌 게이츠, 뉴욕 증시, 미국 우주왕복선, 일본의 신칸센이 새롭게 등장했다. 일본과의 협력을 고려해서인지 난징(南京) 대학살도 과거에 비해 간단하게 다뤄졌다.

한마디로 새 역사교과서에는 계급투쟁과 사회주의혁명 대신 산업혁명과 정보혁명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으려는 중국의 국가적 목표가 뚜렷이 반영돼 있다. 과거와 이념보다는 미래와 실용을 중시하는 정책 노선 또한 투영돼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새 역사교과서는 중국이 자국의 과거사 정리가 완료됐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78년 개혁개방을 시작한 이래 중국 지도자들의 큰 고민거리는 마오쩌둥(毛澤東)과 마오쩌둥 시대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였다.

만일 마오 및 마오 시대를 전면적으로 부정한다면, 중국공산당 및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체성과 정당성이 도전을 받게 될 것이었다. 그렇다고 재평가를 유보하면 마오 시대의 급진적 사회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나 개혁개방을 추진해야 하는 근거 및 정당성이 붕괴될 우려가 있었다.

덩샤오핑(鄧小平)과 중국의 지도자들은 1981년 6월의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 ‘건국 이래 (중국공산)당의 약간의 역사 문제에 대한 결의’에서 마오의 사회주의혁명의 공적은 인정하는 동시에 극좌적 실험에 대해서는 비판하는 특유의 실용적 타협책으로 과거사 문제를 봉합했다.

이 미봉책으로부터 25년, 새 역사교과서의 내용은 경제적 시장주의가 이제 공론의 대상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음을 보여 준다. 중국판 과거사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사회주의에서 출발한 중국은 과거와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나 지구적 흐름에 당당히 발맞추어 나아가고 있는데 한국은 어떠한가? 정부의 과거사에 대한 집착과 이념적으로 편향된 역사교과서 채택으로 사회적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어느 나라나 과거사 정리가 일정 부분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공적과 과오를 균형 있게 평가하지 않고 과오를 문제 삼아 공적까지 싸잡아 비판하는 이분법적 도덕주의이다.

중국의 실용주의적 타협과 한국의 도덕주의적 이분법은 비단 과거사 정리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양국의 극명한 대비는 다른 정책 영역에서도 확인된다. 외교 분야를 보더라도, 중국은 최근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의 외교 노선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매우 유연하면서도 미래 지향적인 정책을 취하고 있다.

일본과 역사 문제로 각을 세우지만 동시에 관계 개선을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하고 있으며 미국과 경쟁은 하지만 협력 노선을 견지하고 있다. 때로는 비굴하게 보일 만큼 미국의 대외 정책에 순응하기도 한다. 우리는 어떤가? 과거사와 자주에 집착하여 지나치게 경직된 외교를 펼치고 있지는 않은지 우려된다.

이영조 경희대 국제대학원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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