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아미티지 당시 미국 국무부 부장관은 파키스탄 정보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보국장은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에게 아미티지 부장관의 말을 이렇게 보고했다.
“각하, 아미티지 부장관이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척결에 협조하지 않으면) 폭격을 당할 각오를 하라. 파키스탄을 석기시대(Stone Age)로 되돌려 놓겠다’고 했습니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아미티지 부장관의 무례한 발언에 분노를 느꼈다. 그러나 그는 넉 달 뒤인 이듬해 1월 신년 연설을 통해 “이슬람 원리주의자들과 싸울 것”이라고 천명했다.
‘아미티지의 석기시대 발언’은 유엔총회 참석을 위해 뉴욕을 방문 중인 무샤라프 대통령이 21일(현지 시간) 미국 CBS방송의 뉴스 프로그램 ‘60분’ 인터뷰에서 직접 밝힌 것이다.
미국의 반(反)테러전쟁에 적극 협력한 공로로 2년 전 ‘비(非)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국’ 지위를 부여받은 파키스탄의 대통령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불과 몇 시간을 앞두고 이런 얘기를 공개한 것이다.
두 정상의 불편한 관계는 전날에도 드러났다. 부시 대통령은 20일 CNN방송 회견에서 오사마 빈 라덴이 파키스탄 영토 안에 숨어 있다는 정보가 있을 경우 그를 체포하거나 사살하기 위해 미군을 투입할 것이냐는 질문에 “물론이다. 정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 발언이 전해지자 무샤라프 대통령은 “우리는 절대 그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 스스로 할 것”이라고 격하게 되받았다. ‘석기시대’ 협박성 발언 폭로도 그에 이은 것이다.
석기시대 발언이 논란을 빚자 당사자인 아미티지 전 부장관은 21일 CNN방송에 출연해 “당시 나는 그런 발언을 한 적도 없고 실행할 권한도 없었다”고 반박했다.
그는 “나는 단지 ‘이슬람 국가들이 우리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적이 될 것인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석기시대라는 말은 미국 지도자들이 ‘초토화 폭격’이라는 의미로 과거에도 자주 사용하던 표현이다. 베트남전쟁 당시 미 공군 참모총장 커티스 러메이 장군은 “북베트남을 석기시대로 되돌려 놓겠다”고 발언해 물의를 빚었다. 그는 미 육군항공군 21폭격비행사령관으로 있던 1945년에도 “도쿄(東京)를 석기시대로 되돌리겠다”고 맹세한 뒤 융단폭격을 퍼부어 80여만 명의 사상자가 났다.
한국전쟁 때에도 미 종군기자들은 폐허가 된 북한 지역을 석기시대에 즐겨 비유했고, 가깝게는 1991년 걸프전쟁 때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이 “이라크를 석기시대로 되돌릴 정도로 폭격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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