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이 한인들을 강제로 이주시키기 전까지 우리 집에는 항상 손님이 넘쳤지요. 대부분 하얀 옷을 입은 고려인들이었는데 고모는 그들을 ‘레베디(백조)’라고 불렀어요. 하지만 (지역) 당내 서열 3위 간부였던 아버지는 일본의 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2년 후 처형됐어요.”
현재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살고 있는 전직 내과 의사인 데카브리나 김(80) 씨가 최근 미국 미시간대 한국문제연구소의 우정은(정치학)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에 전한 70년 전의 기억들이다. 우 교수와 저명한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자 이 대학 예술·디자인학과 조교수인 데이비드 정 씨는 최근 3년간 수차례의 현지답사를 통해 고려인 강제 이주의 진실을 복원해 냈다. 연구팀은 수백 명의 생존자를 만나 당시의 기억을 듣고 사진과 문헌들을 수집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18만 명에 이르렀던 연해주, 하바롭스크 일대 한인들은 거의 한 명도 남김없이 중앙아시아 미개척지에 버려졌다. 이주를 거부하면 처형됐다.
집단농장에서 일하다 은퇴했다는 세르게이 윤 씨는 “열차의 가축 수송칸에 타고 카자흐스탄의 황무지까지 실려 가는 도중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시신은 기차 밖으로 버려졌다. 당시 사람들은 고려인 수송 열차를 ‘귀신열차’라 불렀다”고 회고했다.
우 교수팀의 조사와 중앙아시아 민족문제 연구의 권위자인 카자흐국립대 저먼 김 교수에 따르면 당시 고려인 강제 이주는 스탈린의 ‘인종 청소’ 명령에 따른 첫 작업으로 이뤄졌다. 스탈린이 한인을 첫 이주 대상으로 정한 이유는 두 가지로 분석된다.
우 교수는 “미하일 김 씨를 비롯한 소련 공산당 한인 고위 간부들이 처형당하지 않았더라면 소련이 북한 정권을 말단 장교인 김일성이 아니라 모스크바와 관계했던 한인 간부들에게 맡겼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일제 강점과 기근 등 타의에 의해 해외로 떠난 한인들의 역사도 한국사의 주요 대목으로 조명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우 교수팀은 답사 결과를 토대로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고려사람-못 믿을 민족’(스탈린의 시각)을 29일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새클러 갤러리에서 처음 상영한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