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아이의 엄마 ‘라 프레지당트’ 꿈꾸다
《프랑스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을 꿈꾸는 사회당의 세골렌 루아얄(53·사진) 의원이 첫 관문을 가볍게 통과하고 꿈에 한걸음 더 다가갔다.
16일 치러진 사회당의 대선후보 경선에서 루아얄 의원은 과반인 60.6%를 얻어 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경선에 나선 중진의 두 남성 후보는 거센 ‘루아얄 돌풍’에 맥없이 무너졌다. 21만9000여 명의 당원 가운데 82%가 참가한 투표에서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전 재무장관은 20.8%, 로랑 파비위스 전 총리는 18.5% 득표에 그쳤다.
사회당 당원들이 루아얄 의원을 선택한 것은 의미 있는 변화로 해석된다. 루아얄 의원은 경쟁자들로부터 “한 국가를 이끌기엔 무게감이 떨어진다”거나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스트”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그런데도 당원들이 우파적인 주장까지 서슴지 않는 루아얄 의원을 선택한 것은 기성 정치인에게 품은 염증이 반영됐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루아얄 의원은 또 인터넷과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젊은 층을 파고드는 데도 성공했다.
루아얄 의원은 내년 4월 대선에서 집권 대중운동연합(UMP)의 후보로 유력한 니콜라 사르코지 내무장관과 접전을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
○ 권위적인 군인 아버지 밑에서 ‘투쟁’하며 성장
프랑스에선 요즘 ‘르 프레지당(le pr´esident)’이냐 ‘라 프레지당트(la pr´esidente)’냐를 놓고 논쟁이 한창이다.
‘대통령’을 뜻하는 ‘르 프레지당’은 남성형 명사다. 여성형인 ‘라 프레지당트’가 있긴 하지만 ‘대통령’이라는 의미로 쓰이진 않는다. ‘라 프레지당트’에도 ‘대통령’이라는 의미를 부여해야 하느냐가 논쟁의 핵심이다.
논쟁의 원인 제공자는 루아얄 의원이다. 그가 프랑스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면 그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를 놓고 왈가왈부하고 있는 것. 루아얄 의원의 당선 가능성을 그만큼 높게 본다는 뜻이다.
1953년 세네갈 다카르에서 육군 대령의 8남매 가운데 넷째로 태어난 루아얄 의원의 인생사는 남성 우월주의에 맞선 도전사였다.
그는 ‘여자가 할 일은 자식을 낳는 일뿐’이라고 생각하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에게서 독립하기 위해 어려서부터 ‘투쟁’을 벌였다.
아버지에게서 독립한 뒤로는 정치인의 길을 선택했다. 대학을 마친 뒤 엘리트 관료 양성기관인 국립행정학교(ENA)를 다시 다녔다. 현재 동거 중인 프랑수아 올랑드 사회당 당수와 도미니크 드빌팽 총리가 그의 동기다.
그는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의 보좌관으로 정계에 입문해 1988년 의회에 처음 진출했다. 이어 환경장관과 가족장관을 역임하면서 가족의 가치를 수호하고 아동 보호, 여권 신장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남성 출산휴가 도입, 아동 포르노물 척결 등이 대표적인 업적으로 꼽힌다.
주류 정치인 축에 끼지 못하던 그는 2004년 지방선거에서 푸아투샤랑트 지방의회 의장으로 선출되면서 언론의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1년 전 루아얄 의원이 대권 도전을 선언하기 전까지 그를 대통령후보로 꼽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그가 1년 만에 급부상한 것은 변화를 원하는 유권자들의 바람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 여성의 섬세함-친근함으로 유권자 사로잡아
그는 인터넷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구세대 정치인과 차별을 꾀했다. 올해 초 ‘미래의 희망’이라는 홈페이지를 개설해 정치적 소신을 가감 없이 밝혔고 유권자들과 직접 대화를 나눴다.
여기에서 그는 사회당 정권의 치적으로 꼽히는 주 35시간 근무제를 겨냥해 “미숙련 노동자의 근로환경을 오히려 악화시킨 제도”라고 비판했다. 불량 청소년을 군대가 운영하는 교육 프로그램에 보내자는 제안도 내놨다. 우파보다도 더 우파적인 발언이었다.
50대 이상의 주류 사회당원들에게서 “사회당의 가치를 퇴색시킨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젊은 층을 중심으로 그의 도발적인 발언에 열광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이른바 ‘세골리스트’로 불리는 지지자 7만여 명이 새로 사회당 당원으로 등록했다. 정통 사회주의자들은 “외모와 인기에 영합하는 발언을 앞세워 대중을 끌어들인다”고 비판했다.
루아얄 의원이 외모 덕을 본다는 지적에는 대부분 공감한다. 그가 인기를 끌자 대중지, 여성지 등이 앞 다퉈 그를 표지 인물로 장식했다. 지난여름에는 비키니 차림의 사진이 실리기도 했다.
하지만 경쟁자들의 비방전이 대세를 꺾지는 못했다. 오히려 여성스러운 점 때문에 더욱 인기를 얻었다. 유권자들은 주부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정치적으로도 활발히 활동하는 모습에 높은 점수를 줬다. 루아얄 의원은 25년간 함께 살고 있는 올랑드 당수와의 사이에 4자녀를 두고 있지만 ‘결혼은 부르주아 제도의 산물’이라는 생각에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다.
그는 이처럼 기존 정치판에 식상한 유권자들의 마음을 제대로 파고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외교, 국방 등 대외 정책에선 아직 식견이 부족해 대통령 선거전에선 이런 약점에 발목을 잡힐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한 지지자는 “루아얄이 대통령이 되면 프랑스에선 1789년에 이어 제2의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의 새 대통령을 ‘라 프레지당트’라고 부르는 ‘혁명’이 일어날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파리=금동근 특파원 gold@donga.com
자유주의 경제학 대가 프리드먼 타계
…작은정부論에 일생 건 ‘케인스의 맞수’
《세계적 경제학자인 밀턴 프리드먼(사진) 전 미국 시카고대 교수가 16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지병인 심장병으로 타계했다. 향년 94세.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프리드먼 교수는 대공황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탄생시킨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경제학자로 꼽힌다.
그는 1930년대 뉴딜정책 이후 미국 경제정책을 주도해 온 케인스학파의 ‘정부 개입’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개인의 자유가 경제의 근간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시카고학파’의 좌장(座長)이었다.
특히 오스트리아 출신의 자유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함께 ‘작은 정부, 큰 시장’을 핵심 이념으로 하는 영국 마거릿 대처 행정부와 미국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의 자유시장주의 경제개혁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정신적 스승’으로 꼽힌다. 이 때문에 20세기 말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도 받는다.》
○ 노벨 경제학상의 산실 ‘시카고학파’ 주역
프리드먼 교수는 1912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헝가리 유대계 이민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교 재학 시절 부친이 사망해 식당에서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학비를 벌었다. 그가 뉴욕 인근 뉴저지 주의 럿거스대에 입학한 1929년은 뉴욕 증시가 폭락하며 대공황이 시작된 시기였다.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을 마친 그는 이후 시카고대에서 평생의 반려자이자 학문적 동지인 로즈 디렉터를 만난다. 알파벳순으로 자리가 배정됐는데 성(姓)이 F로 시작되는 프리드먼 교수는 D로 시작되는 그녀 옆에 앉게 된 것. 이때의 인연으로 이들은 6년 후 결혼했다.
프리드먼 교수는 1933년 시카고대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10여 년간 전미(全美)경제연구소(NBER)와 재무부 등에서 근무한 뒤 1946년 컬럼비아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1946년부터 30년간 시카고대에서 경제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이른바 시카고학파를 만들었다. 자신도 통화주의 이론과 경제안정 정책에 기여한 공로로 1976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지만 시카고대는 노벨 경제학상을 배출하는 산실이었다.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뒤 “경제학자 중에서 프리드먼에 필적할 사람은 없다”고 평가했다.
○ “정부의 불필요한 개입이 경제를 어렵게 한다”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자문해 보십시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 연설 중 가장 유명한 대목이다.
그런데 프리드먼 교수는 명저(名著)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케네디 대통령의 연설은 잘못됐다.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모두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는 것 자체도 국가가 개인 위에 군림하는 것을 가정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애덤 스미스의 진정한 계승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는 그만큼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고 정부를 불신했다. 시장에 비해 ‘능력이 훨씬 떨어지는’ 정부가 불필요하게 시장에 개입해 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 일관된 신념이었다. 정부가 일을 적게 할수록 경제에는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철저한 시장경제 체제가 정착되지 않고는 민주주의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렇다고 정부가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정부나 중앙은행이 시장의 효율성을 저해하지 않는 원칙 아래서 통화정책에 개입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봤다. 소득이 일정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근로계층을 위한 세금우대 정책의 필요성도 주장했다.
프리드먼 교수는 정부의 시장 개입 최소화를 주장했기 때문에 전통적인 케인스 경제학파와는 사사건건 충돌했다.
그는 대신 통화주의를 제창했다. 통화 가치 안정을 경제의 최우선 목표로 삼자는 것이었다. 그는 1970년대 인플레이션이 중앙은행의 과도한 통화 공급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통화량을 줄일 것을 주장했다.
그는 대공황에 대해서도 케인스학파와는 다른 해석을 제시했다. 케인스학파는 수요 부족을 원인으로 꼽은 반면 프리드먼 교수는 세계 경제가 위축되는 가운데 중앙은행이 통화량을 줄여 대공황을 부추겼다고 주장했다.
○ 美 레이건-英 대처 경제정책의 토대 마련
프리드먼 교수의 주장은 처음에는 경제학계에서 ‘변방이론’에 속했다. 그러나 케인스 경제학이 과도한 인플레이션에 의한 경기침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통화주의 이론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의 학설은 레이건 행정부 등 미 공화당 정부의 정책으로 현실화됐다. 레이건 대통령 재임 때는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대서양 건너 영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처 전 영국 총리는 재임 기간 프리드먼 교수의 통화주의를 바탕으로 국가경제를 운용했다. 그의 경제정책은 ‘대처리즘의 교과서’였다.
프리드먼 교수의 통화주의 이론은 또 현대 각국의 중앙은행 운영에 중요한 토대가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마디로 그의 이론이 20세기 세계사를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1970년대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독재정권에 경제 자문을 했다는 이유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대규모 시위대가 1976년 스톡홀름에서 열린 노벨상 시상식 장소에서 시위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피노체트 정권은 인권 유린 등으로 많은 비판을 받고 있지만 프리드먼 교수의 이론을 채택한 경제정책만큼은 효과적이어서 이후에도 칠레 경제가 중남미에서는 이례적으로 견실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뉴욕=공종식 특파원 kong@donga.com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홍석민 기자 sm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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