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변호사의 올곧은 혼이 잠들어 있는 거실 한쪽의 불단(佛壇) 위에 일본 사법시험위원회가 발행한 아주 특별한 합격증이 올려졌다.
‘국적: 한국, 이름: 김창호.’
창호(22) 씨는 아버지의 영전에 나지막이 보고했다. “아버지가 열어 놓으신 그 길을 이제 제가 걸을 수 있게 됐습니다.” 창호 씨 곁에서 어머니 손영란(49) 씨가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도쿄대 법학부 4학년에 재학 중인 창호 씨는 합격률 1.81%의 바늘구멍을 뚫고 올해 2차 시험에 당당히 합격했다.
로스쿨을 나오지 않은 법대생들이 주로 응시하는 일본의 옛 사법시험은 7수, 8수도 예사일 만큼 어려운 관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합격자 549명 중 현역 대학생은 15.8%에 불과한 87명.
창호 씨는 잠잘 때, 밥 먹을 때, 화장실 갈 때를 제외하고는 책상에만 앉아 법전과 씨름했다. 하루에 100걸음도 못 걸을 때가 많았다.
고 김 변호사가 일본 사법시험 합격증을 받은 것은 30년 전인 1976년 이맘때였다. 신문기자가 되고 싶었으나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입사를 거절당해 두 번째로 선택한 길이었다.
하지만 최고재판소(대법원)에서 ‘사법연수원에 들어오려면 국적을 일본으로 바꾸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법조인이 간절히 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민족을 버릴 수는 없었다. 이때부터 그의 외로운 투쟁이 시작됐다. 그는 최고재판소에 눈물로 호소하는 청원서를 보냈다.
“나 개인이 사법연수생이 되느냐, 마느냐는 일본 귀화로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내 문제가 아니라 65만 재일동포의 권리에 관한 것입니다. 나는 재일동포들이 받고 있는 차별과 편견을 없애기 위해 변호사가 되려 합니다. 나의 존재 의의를 없애는 일본 귀화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일본 아사히신문에도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는 투고를 했다. 일본의 양심과 상식이 움직였다. 최고재판소는 결국 이듬해 3월 그를 사법연수원에 받아들였고 고인은 1979년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 변호사 자격증을 받았다.
변호사가 된 뒤에도 그는 언제나 재일동포들의 권리를 위해 싸웠다. 창호 씨는 집에서 고집스럽게 한국말을 쓰는 아버지 때문에 유치원에 들어갈 때까지도 일본말을 할 줄 몰랐다.
창호 씨는 일본의 3대 명문고로 꼽히는 아자부(麻布)고교에서 수석을 다퉜고 일본에서 가장 들어가기 어렵다는 도쿄대 법학부에 가볍게 합격했다. 하지만 창호 씨는 스스로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어머니 손 씨도 “노력파”라고 거들었다. 손 씨는 “초등학교 때부터 내가 불을 끄고 나가면 다시 일어나 불을 켜고 공부를 했다”면서 “저러다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까지 했다”고 회고했다.
창호 씨는 “일본에서 살려면 눈에 보이지 않는 불리함이 있기 때문에 공부로 이를 보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가 억척스럽게 공부해 재학 중 합격을 이뤄낸 것은 암과 투병하는 아버지를 지켜보며 장남으로서 어깨가 무거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생전의 김 변호사는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동네 도서관에 가서 아이들이 볼 책을 빌려다 놓았다. 김 변호사는 지난해 12월 28일 암으로 별세하기 직전까지도 자녀들을 위해 책을 빌려오는 일만큼은 자신의 손으로 했다고 한다.
이런 덕분인지 창호 씨의 동생인 미사(20) 씨도 3년 전 일본의 양대 사립 명문인 게이오(慶應)대에 입학했으며 올해는 1년 일찍 로스쿨 시험에 합격했다. 셋째인 유미(고 3·18) 양과 넷째인 인회(중 2·14) 군의 꿈도 법학을 전공해 변호사가 되는 것이다.
고인이 평소 “형제 중 한 명이 나와 같이 외로운 길을 걸으면 다른 형제들이 힘이 되어 주라”고 당부한 것이 영향을 주었다는 게 손 씨의 설명이다.
창호 씨는 “국제법과 지적재산권 분야의 전문 변호사가 장래 꿈”이라면서 “하지만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인권변호사 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사법연수원을 졸업한 뒤에는 한국에 유학해서 한국 사법시험에도 도전할 생각이다.
그 이유를 어머니 손 씨가 대신 설명했다.
“재일동포들은 일본에서도 차별받는 존재이지만 고국에서도 ‘한국말도 못하는 이상한 사람들’로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재일동포가 당당하고 능력 있는 존재라는 것을 한일 양국에 보여 주고 싶어서입니다.”
도쿄=천광암 특파원 iam@donga.com
故김경득 변호사는
“민족에서 도망쳤다가 민족으로 돌아와, 민족을 위해 평생을 살았다.”
지난해 12월 28일 영면한 김경득 변호사의 일생은 이렇게 요약된다. 1949년 일본 와카야마(和歌山) 시에서 태어난 그는 소년 시절 철저히 일본인 행세를 했다. 길에서 어머니를 만나도 한국어를 쓰기 싫어 모르는 체했다.
1972년 와세다(早稻田)대 법학부를 졸업한 뒤 그의 인생은 바뀐다. 사법시험에 합격했지만 외국인이란 이유로 사법연수원 입소를 거절당했기 때문. 그는 ‘커밍아웃’했다. 정면으로 맞섰다. 외로웠다. 우여곡절 끝에 3년 뒤 첫 외국인 일본 변호사가 될 수 있었다.
이후 재일교포 국민연금소송, 지문날인거부 운동, 일본군 위안부 전후보상 소송 등 재일동포 인권운동의 중심에는 늘 그가 우뚝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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