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스트리트 한국 진출 1년…로비 성적은

  • 입력 2006년 12월 9일 03시 02분


《한국 정부가 ‘K 스트리트’에 뛰어든 지 1년이 지났다. K 스트리트는 세계 정치의 중심지로 불리는 미국 워싱턴 시내의 한 거리. 수많은 로비회사가 이 길 주변에 몰려 있어 로비의 대명사처럼 불린다.

한국의 미국에 대한 로비는 1970년대 박동선 스캔들처럼 어두침침한 ‘작업’만 있었을 뿐, 미국 헌법이 보장하는 공식 로비활동은 전무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대미 로비를 시작한 지 1년, 그동안 K 스트리트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관련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해 본다. 다만 국익에 반하는 내용이나 특정 정치인의 신상은 가급적 기사화하지 않았다.》

워싱턴 로비 업무에 관여하고 있는 L 씨는 올해 초 비자면제협정 문제의 열쇠를 쥐고 있는 미국 의회의 한 간부에게 “한번 만나고 싶다”는 전갈을 넣었다. 그러나 번번이 돌아오는 대답은 “바쁘다”는 것이었다. 간신히 사무실 방문 허락을 받았지만 앉자마자 면박 주듯이 “로비할 생각 말라”고 쐐기를 박았다.

그러나 참담한 심경으로 돌아온 L 씨는 “시간 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라는 정중한 감사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기대하지 않았던 호의적인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와 수시로 식사를 하고 전화를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이 간부가 비자면제협정 문제에서 한국 편이 됐음은 물론이다.

공식적인 대미(對美) 로비 한 돌을 맞은 한국 정부에 ‘K 스트리트’는 껍질을 벗길수록 새로운 양파 같은 세계다. ‘돈과 표’가 제일 중요한 것 같으면서도 그것만으로는 안 되는….

○ ‘걸음마 1년’

주미 한국대사관은 2005년 여름부터 로비스트 물색에 나섰다. 검토 결과 한국계 미국인인 토머스 김 씨가 공동 운영자로 있는 ‘스크라이브 전략 & 자문’이란 로비회사가 가장 좋은 점수를 받았다. 2005년 10∼12월 활동비를 포함해 월 1만 달러의 시범 로비 계약을 했다. 이어 올해 초 비자면제 프로그램과 한미 관계 등 두 과제를 위한 로비에 월 3만 달러를 지급하는 내용의 정식 계약을 했다.

이와 별도로 최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본격화되면서 경제 분야에서도 로비 활동이 본격화됐다. 계약은 전국경제인연합회 및 한국무역협회가 맺고 대사관이 이를 활용하는 방식이다. 전경련은 전직 의원이 세운 회사를 고용했다. 1년간 한국 정부가 펼친 로비의 가장 가시적인 결과물은 한국의 비자면제 프로그램 가입 지지 여론을 높인 것. 하원의 경우 행정부에 지지 서한을 보낸 의원이 35명에 이른다.

일본군위안부 결의안도 9월 처음으로 하원 국제관계위원회를 통과했다. 올해 의원들이 발표한 한국을 지지하는 18건의 성명서, 주요 인사 방미 시 나오는 환영 성명, 의회 관련 전문지들의 한국 관련 특집 보도 뒤엔 로비의 숨은 힘이 적잖게 작용했다고 의회 관계자들은 전한다.

○ ‘사람 사는 세상은 다 마찬가지’

로비스트들과 로비 업무에 관여하는 외교관들은 지난 1년간 주요 의원과 보좌관, 언론인들을 집요하게 찾아다녔다. 인사를 나눈 뒤 식사에 초대하는 게 순서다. 반응은 천차만별이었다.

한 의회 간부는 사무실에선 딱딱하기 그지없었으나 식당으로 초대하니 태도가 바뀌었다. 워낙 식욕이 왕성해 항상 3개 이상의 코스를 시켰다. 좋은 식당만 예약해 놓으면 ‘만사 OK’였다. 규정상 1인당 20달러 이내의 식사 대접만 허용되지만 100달러를 초과할 때도 있었다.

반면 상원 민주당 소속의 한 전문위원은 꼭 카운터파트인 공화당 전문위원을 데리고 나왔고 자기 식사비는 반드시 스스로 계산하고 나갔다.

골프장으로 초청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 그린피가 1인당 50∼100달러인 중상급 퍼블릭 코스를 주로 이용한다고 한 로비스트는 전했다. 물론 규정상 선물이나 접대 한도는 50달러 이내이지만 주말에 워싱턴 근교에서 50달러 미만짜리 골프장을 찾기는 쉽지 않다.

정치인들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은 역시 표와 후원금. 특히 한국계 유권자가 많은 지역의 의원들에겐 ‘한국계의 표심’을 강조하면 십중팔구 “어떻게 도와줄까”라는 반응이 나왔다.

“국무장관에게 한국을 비자면제 대상국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 주면 좋겠다”는 식의 부탁을 한다. 1주일 만에 편지를 보내 주는 의원도 있었다.

정치 후원금을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아예 모른 척하면 섭섭해하기도 한다. 남부 출신의 한 의원은 사석에서 “한국 경제인들이 ‘중요한 메시지가 있으니 시간을 내달라’고 해서 만나 보면 ‘잘 부탁한다’고 자기들 얘기만 잔뜩 하고 돌아간다”고 불만을 토로 했다.○ ‘갈 길은 멀고 산은 높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위안부 결의안 등 태평양전쟁 문제가 미 의회에서 공론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헨리 하이드 국제관계위 위원장과 동향(일리노이 주)이며 1994년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를 지낸 밥 마이클 씨에게 로비를 맡겼다. 월 6만 달러를 주는 조건으로 알려졌다. 한국 정부의 전체 로비액이 월 3만 달러인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규모다. 한 자료에 따르면 기업 로비를 합쳐 2004년 기준으로 일본은 연간 1341만 달러, 대만은 625만 달러를 사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툭하면 청와대나 여권에서 터져 나오는 ‘문제 발언’들도 로비의 효과를 반감시키는 요인으로 지적된다. 현장에서 어렵게 쌓아 올린 ‘친한(親韓) 감정’이 바닷가 모래성처럼 쓸려 나간다는 것이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민주당으로” 로비스트들 발길 이동

중간선거 이후 K 스트리트 달라진 풍속도

#장면 1

미국 11·7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한 직후인 16일 밤. 워싱턴 의사당 서북쪽 귀퉁이에 위치한 한 건물의 9층과 10층에선 왁자지껄한 파티가 열렸다. 이날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 및 부대표에 선출된 정치인 2명을 위한 별도의 자리였다. 두 행사는 누가 개최했을까? 로비회사였다. 워싱턴포스트는 “두 행사를 번갈아 돌아다니는 수많은 로비스트와 정치인 때문에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다”고 썼다.

#장면 2

거대 제약회사인 글락소스미스클라인은 중간선거 직후 새로 입성한 정치인의 성향 파악 작업을 시작했다. “공화당 A 의원의 낙선으로 로비망에 큰 구멍이 뚫렸고, 민주당 B 의원이 하원에서 상원으로 입성하면서 제약회사들에 대한 압력이 거세질 것”이라는 내부 평가가 내려졌다.

미 제약업계는 수입의약품 제한 완화 조치를 두려워한다. 저가약품 유입은 가격 경쟁을 부를 수밖에 없다. 민주당은 “저소득층의 부담을 줄이겠다”며 수입 촉진을 공약해 왔다.

민주당의 중간선거 승리는 의사당에서의 승리에만 그치는 게 아니다. 워싱턴 로비업계인 K 스트리트의 권력 이동까지 만들어 내고 있다.

▽이제는 D 스트리트?=친(親)기업 정책을 펴는 공화당과 로비스트들은 궁합이 잘 맞는다고 볼 수 있다. 공화당이 30년 야당 생활을 마감한 1994년 이후 K 스트리트는 번창했고, 공화당 대통령(조지 W 부시)이 들어선 2001년 이후 절정으로 치달았다. 그래서 지난 몇 년간 K 스트리트는 공화당(Republican)을 뜻하는 의미로 ‘R 스트리트’라는 농담도 돌았다.

그러나 이제 권력은 민주당(Democratic)으로 넘어갔다. 앞으로는 ‘D 스트리트’라는 말이 나올지 모른다.

K 스트리트에선 ‘실력자와의 거리가 곧 권력’이라는 말이 통한다. 환경 및 노동 문제를 강조하는 민주당의 의회 장악은 민주당의 외곽조직 역할을 해 온 노조 및 환경단체 로비스트의 부활을 의미한다. 환경운동단체인 시에라 클럽의 한 간부는 방송에 출연해 “공화당 지도부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민주당은 선거 직후부터 ‘필요한 게 있으면 이야기해 달라’는 전갈을 보내 왔다”고 했다.

‘포데스타-머툰’과 같은 민주당 성향의 로비회사에 월마트, 석유기업 BP의 계약 요청이 잇따른다고 한다. 노조나 환경 문제가 부각되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기업들이다. 이 로비회사의 공동대표는 빌 클린턴 행정부의 백악관 비서실장을 지낸 존 포데스타 씨의 친동생. 민주당 접근 능력이 최상위권인 로비회사다.

▽험난한 로비 개혁=중간선거 기간 내내 로비 스캔들이 이슈화하자 민주당 지도부는 1월4일 새 의회가 개원하면 100시간 이내에 로비 개혁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현역 의원의 선물 및 공짜여행 수수 금지, 로비스트의 활동 보고서를 검증하는 ‘공공 도덕성 기구’ 수립이 주요 항목이다.

그러나 성과는 자신할 수 없다. 현재 현역 의원은 낙선 후 1년이 지나면 로비스트로 변신할 수 있다. 전직 의원은 의원전용식당 및 체육관 출입이 허용되고, 회기 중에 본회의장 출입도 가능하다. 이런 철옹성 같은 ‘로비 네트워크 유지 구조’가 쉽사리 바뀔지는 미지수다.

특히 ‘상한선 없는 선거자금’ 구조가 만들어 낸 ‘돈에 약한’ 정치인 양산 구조는 달라질 기색이 없다.

하원의원 선거에 드는 돈은 대략 100만 달러. 2년 임기라는 점에서 당선 직후부터 매주 1만 달러를 모금해야 한다.

워싱턴=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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