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생들이 보는 룰라
브라질 상파울루 시내 후아몬트 지역의 가톨릭대학교.
방학을 앞둔 12월의 한가로움이 가득한 캠퍼스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토론을 하는 여학생들을 발견했다. 신설학과인 치료보조학과 2학년 여학생들이 브라질의 고질적인 빈부 격차며 높은 실업률을 화제로 난상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진로 고민도 자연스럽게 곁들여졌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은 여전히 ‘가난한 이들의 희망’이지만, 더 많은 변화와 개혁을 기대했는데 ‘아쉬움이 많다’는 반응도 있었다. (#부분은 기자 설명.)
○ 룰라 대통령에게 건 기대
▽마리아나 비아나 파이바=룰라 대통령이 좋아. 가난한 노동자로 출발해 대통령이 된 게 감동적이잖아.
▽카를라 루이스 카밀루스=나는 싫어. 대통령이 된 뒤 너무 변했어.
▽나탈리 카스트루=룰라가 스스로 노동자당(PT) 자체가 되어 버린 것 같아. PT가 원하는 것만 하잖아.
▽카밀루스=다른 정당도 많아서 그런 게 아닐까. 정치는 혼자 힘을 발휘하지 못하잖아.
(#브라질엔 신이 세상을 창조할 당시를 각색한 유머가 있다. 신은 넓은 땅과 좋은 자연환경을 가진 미국에는 네바다 사막을, 러시아엔 시베리아를, 중국에는 자연재해를 만들었다. 오직 브라질만 완전무결한 듯했다. 대천사가 왜 브라질에만 아무 문제가 없냐고 묻자 신은 “정치인을 봐라. 그들이 일으킬 문제는 자연재해에 비할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29개 군소정당이 난립한 브라질의 정치 현실은 이 유머처럼 혼란 그 자체다. 상대 후보를 매수하고 정치인들이 돈에 따라 당적을 옮기는 일도 다반사다. 일간지 이스타두의 모아시르 아순캉 정치부 기자는 “지역구 투표제 확립, 군소정당 난립 방지, 선거비용 지원 개선을 목표로 한 정치개혁이 실패를 거듭해 왔다”고 말했다. 룰라 대통령이 분배에 중점을 두는 좌파 성향의 본래 색깔을 나타내지 못하고 성장을 강조하는 이유도 바로 정체성 없는 정치연합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 포퓰리즘이 해법일까
▽카밀루스=포퓰리즘은 대중을 위한 것이니까 빈부 격차를 해소할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빈곤층을 돕더라도 다른 계층에 피해를 주지 않았으면 좋겠어.
▽줄리아나 피르스=룰라는 포퓰리스트는 아닌 것 같아. 예전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하켈 아파레시다 마르케스=그러니 토지 개혁이 실종됐지. 룰라가 내세운 개혁은 이젠 힘들 것 같아. 빈부 격차 해소는 포퓰리즘이냐 아니냐는 형식을 뛰어넘는 중요한 문제인데….
▽카밀루스=이번 대선도 국민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면 의식 있는 계층은 투표로 변화를 불러오고, 그 변화를 지켜본 다른 층도 나설 텐데….
(#룰라 대통령이 2002년 대선에서 내세운 공약은 민영화 중단, 최저임금 인상, 외채지급 유예, 농지 개혁, 일자리 1000만 개 창출이었다. 이런 선심성 공약을 두고 엔히크 알테마니 지 올리베이라 상파울루 가톨릭대 아태연구소장은 “포퓰리스트 정치가들이 자기 권리 의식이 부족한 빈곤층을 선거로 이용한다”고 지적했다. 룰라 대통령은 자신의 공약에 놀란 국제통화기금(IMF)과 각종 금융기구가 기존 차관 연장 불가로 대응하면서 환율이 오르고 주식이 폭락하자 친시장적인 경제정책을 내세웠다.)
○ 브라질의 교육 문제
▽둘시니아 킨텔라 비아나=학교가 너무 부족해.
▽카밀루스=정부가 무식한 국민을 원하기 때문이야.
▽파이바=교육을 못 받은 국민이라면 자기들 마음대로 끌고 가기 쉽기 때문이겠지.
▽비아나=학력이 아니라 교육 자체가 중요한데….
▽마르케스=맞아. 룰라 대통령도 학력은 없지만 교육을 못 받았다고 할 수는 없잖아.
▽피르스=룰라 대통령은 예외적인 경우야. 예외가 전체를 대표할 수는 없어.
(#예전 정부나 현 정부나 대중 우민화 정책을 쓴다는 불만이 사회에 팽배하다. 물가는 싸지만 책값은 선진국보다 비싸다. 페르난두 리논지 상파울루 주립대 기획분석연구소장은 “과거 토지가 소수 지주들에게 분배됐고 짧은 의무교육 기간으로 교육 기회가 적기 때문에 ‘포퓰리즘의 자양분’인 소득 불균형이 발생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룰라 대통령은 빈민가구 지원기금을 조성하는 ‘보사 파밀리야’, 기아를 없애겠다는 ‘포미 제로’, 저소득층 학생의 학자금을 지원하는 ‘프로 우니’ 정책을 의욕적으로 추진했지만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는 상황이다.)
○ 대학 졸업 이후의 진로와 취업 전망
▽카밀루스=우리 과는 전망이 그리 좋지 않아. 신설학과여서 가능성은 많지만.
▽비아나=우리 전공과 직업이 추구하는 것은 사회적인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거잖아. 그런데 의사들이 인정하지 않아.
▽피르스=정부에서도 힘을 안 실어 주잖아. 국립병원도 외면해서 걱정이야.
(#브라질의 2005년 실업률은 9.8%. 비공식적으로는 20%를 넘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긴축재정에 따른 저성장의 여파인 셈. KOTRA 상파울루 무역관의 지은희 과장은 “2006년 브라질의 경제성장률은 당초 전망과 달리 3.0% 선에서 그칠 전망”이라며 “룰라 2기 정부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상파울루=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룰라 정치기반 유지위해 親시장정책으로 돌아서
▼상파울루 가톨릭대 완데를리 남미연구소장▼
“포퓰리즘은 지도자가 개인의 카리스마를 내세워 대의민주정치 기구인 정당을 통하지 않고 대중과 직접 접촉하는 바람에 나타난 정치 행태입니다. 극심한 빈부 격차가 그 온상이라고 할 수 있죠.”
“브라질의 정치사회적 환경에 큰 변화가 없는데도 좌파인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이 포퓰리즘 공약을 포기하고 변신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친시장 정책 위주의 ‘네오 포퓰리즘’ 노선만이 살길이라고 판단한 때문이죠.” 그는 급격한 변화에 따른 경제적 파장을 최소화하고 안정된 정치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룰라 대통령의 변신이 불가피했다고 진단했다.
―야당과 언론은 여전히 룰라 대통령을 포퓰리스트라고 부르는데….
“그의 말투 때문입니다. 엘리트 출신이 아니라 노동자 출신인 룰라 대통령은 종종 빈곤층과 문맹자들 앞에서 막말에 가까운 상스러운 말을 씁니다. 심지어 일부러 틀리게 말하거나 지나치게 요점을 단순화합니다. 빈곤층이 편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런 말투를 오히려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일종의 포퓰리스트 방식이죠. 그러나 언론은 이를 글로벌 시대에 맞지 않는 태도라고 비판합니다.”
―룰라 대통령이 포퓰리즘 공약을 포기한 직접적인 이유는….
“가장 크게는 국가신인도 저하를 우려했기 때문이지만 한편으로는 언론과 기업의 반응을 걱정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포퓰리스트의 대표적 인물인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조차 토지개혁을 추진하다 정권교체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룰라 대통령과 노동자당(PT)은 급진적인 좌파 정책으로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낀 것으로 여겨집니다.”
―포퓰리즘은 빈부 격차 해소의 답이 될 수 있나.
“분배를 중시하고 국민을 조작하는 전통적인 포퓰리즘이라면 분명히 정답이 아닙니다. 다만, 시장 친화적인 정책을 추진하려는 네오 포퓰리즘을 통해 성장을 이룬다면 빈부 격차 해소에 어느 정도는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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